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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동대문 시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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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동대문 시대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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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대 초창기 동대문구 이문동 지역 사진
▲ 한국외대 초창기 동대문구 이문동 지역 사진

그동안 ‘시대’ 시리즈를 쓰면서 마지막 편은 ‘동대문’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해왔다. 아직도 내 인생은 진행 중이므로 현재 시점에서 마무리로 이 글을 쓴다. 내 출생지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대문 옆 성곽에 위치한 이화여대부속병원이다. 그리고 본적지는 동대문구 용두동 683번지이다.

용두동은 안암동 아래쪽으로 제기동 사이에 있다. 예전에 서울대 사범대가 있었는데 현재는 지하철 제기역 근처이다. 1960년대에는 성동역이 있었던 자리인데 주변에 용두천이 흘러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설렁탕으로 알려진 선농단도 이 근처에 있다. 청량리역과 더불어 성동역은 이 지역의 교통 중심지이다.

이곳에 황해도 해주시 북욱동에서 인천으로 월남하신 친할아버지가 자리를 잡으신 곳이다. 과수원이 많았던 이문동에 사시다가 시내 가까이로 이사하여서 용두동에 자리를 잡으셨다. 슬하에 자녀분이 3남 2녀, 결코 적지 않은 식구였는데 그중 둘째 아들이 우리 아버님이시다.

할아버지가 월남하시며 가져오신 거라곤 아무것도 없으셨고 맨손으로 남하하셔서 목수기술로 7식구의 생활을 해결하셨단다. 큰 키에 할머니의 잔소리를 침묵으로 답하시는 과묵하신 분이었다고 외손주였던 고종사촌 승일형의 말을 들었다. 승일 형은 할아버지에겐 첫 외손주로서 어릴 때였다.

할아버지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으신 게 큰아버님이신데 지방에서 공직생활을 하셨다. 장손인 동생도 손재주가 있어 광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었다. 할아버님은 이곳에서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우리는 왕십리로 이사를 했다. 청량리와 왕십리는 인접해 가까운 거리이다.

청량리라 하면 청량리동과 전농동, 그리고 청량리역 주변을 이르나 넓은 의미로 서울 동부지역 부도심을 이르니 지척의 동네들을 포함해 청량리라 한다. 경기, 강원지역에서 서울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청량리동의 떡전교가 있었던 곳을 거쳐 들어와야 한다. 떡전교란 떡 파는 가게가 많아서 붙여진 명칭이다.

어머니 고향은 강원도 양구인데 당시는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춘천에 가셔서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친정엘 가셨다. 청량리역까지 가서 배웅을 하고 아버님과 함께 간 곳이 오스카 극장이다. <인목대비>를 본 기억이 나는데 우리 아버님도 영화구경을 꽤나 즐기셨던 것 같다.

큰아버님도 일제강점기에 이문동에서 동대문에 있던 옛 한일극장까지 뛰어가서 보고 오시곤 했다는데 정말 그 시대에 영화구경이란 이렇듯 고행의 행로였을 것이다. 큰아버님은 추석날에도 극장에 가셔서 꼭 영화를 보고 오시곤 했다.

이렇듯 당시에는 영화라는 신문물을 통해 세상구경을 하셨는데 극장은 일종의 학교였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극장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간접경험 한다. 극장 하나 변변치 않던 청량리에 극장이 생겨난 것은 언제 부터일까?

내가 극장을 찾을 무렵 있던 극장들은 경동시장 내에 있었던 경동극장, 삼성의 빌딩으로 변신한 오스카극장, 굴다리로 가는 뒷골목의 시대극장, 청량리 사거리의 동일극장, 롯데백화점으로 바뀐 대왕극장 그리고 후에 생긴 소극장인 청량극장, 휘경동에 있던 대영극장 터에서 개봉관으로 오픈했던 채원극장 까지 내 발 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극장마다 본 영화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주로 1980년대 왕십리 쪽 극장으로도 모자라 청량리로까지 영역이 확대되어 있었는데 개봉 편수가 많지 않던 시절에 보았던 영화를 몇 번씩이나 본 것이다. 나는 주로 휘경동 집 근처에 있었던 채원극장의 단골손님인데 으레 프로가 바뀌면 갔다. 이두용 감독의 철 지난 영화들과 홍콩느와르 영화, 헐리우드 SF 영화들이 기억난다.

휘경동으로 이사한 것은 중앙대에 입학하고 집을 마련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결정한 것이다. 중앙대 옆의 흑석동, 한양대 근처의 성수동, 그리고 경희대 옆의 휘경동을 놓고 저울질 하다가 휘경동으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월남 후 처음 자리 잡으셨다는 이문동 옆에서 살고 싶은 회귀 본능 때문이다. 큰댁도 후에 이문동으로 이사를 오셨다.

이래저래 동대문구와의 인연은 길다. 이렇게 순간의 선택이 휘경동에서 30년을 살게 했다. 이렇게 오래 산 것은 이곳이 살기에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종로까지 지하철로 10여분 거리이니 교통까지 편리하고 동네도 정이 들고 대학가 근처라서 살기도 좋았던 탓이다. 결국 1975년에 750만원을 주고 산 집을 2000년대 인근에 이문동 레미안 아파트로 이사 가며 30년 만에 팔았다.

내가 살던 곳은 일제강점기에 태창직물이라는 방직회사가 자리했던 곳이다. 광복 후 큰 단지를 조성해 그곳에 주택을 지어 분양을 하며 동대문 밖에서는 가장 큰 주택단지였고 지금도 그 단지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외의 지역까지도 개발되어 주택가의 범위는 엄청 커져버렸는데 비단 이곳만의 현상은 아니다. 인근의 대학도 규모가 커지고 인구가 늘어나며 대형화한 것이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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