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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계 40년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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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계 40년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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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이산가족만남에서 착안한 단편영화 '맥(脈)'
▲ 1983년 이산가족만남에서 착안한 단편영화 '맥(脈)'

2022년 올해로 영화계 입문한지 만 40주년이 된다. 말이 40년이지 엄청난 긴 세월이고 나의 반평생일 터인데 이렇게 빨리 지나갔나 싶다. 1981년 중앙대를 졸업 후 정진우 감독의 연출부로 일하던 나는 현장에서 차차 적응되며 극영화 연출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사실 단편영화 연출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되었다.

우진필름에서 당시 조감독이던 선우완 감독이 데뷔한 <신입사원 얄개>를 마치고 연출 제안을 받았다. 함께 일했던 구중모 촬영기사의 퍼스트 조수였던 임학명이 나와 단편영화 한 편을 찍어 보자고 권유를 했다. 그는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영화계는 한참 선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때 나는 군대를 다녀와 학교를 졸업 후 영화계에 입문했기에 좀 늦은 편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에는 학력을 묻지 않는 게 관례일 정도였다.

어쨌든 그가 이장호 감독의 16mm 보렉스 카메라를 빌려오고 렌즈는 대광기획이라는 광고회사에서 빌려오고 내가 신성사에서 필름을 구입하면서 구체화됐다. 그 때 청소년영화제가 열흘 정도 남았기에 출품을 목적으로 하고는 갑자기 바빠졌다.

여유도 없이, 대본도 없이 저지른 일이었는데 마침 KBS에서 이산가족찾기 방송이 시작되었다. 나는 우선 그 현장부터 담았다. 당시에는 온 한반도가 눈물의 도가니였다. 훗날 이 때 찍은 필름을 활용해 나온 영화가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이다. KBS에서의 화면은 드라마에서 볼 수 없는 생생한 다큐였다.

나는 <맥(脈)>이란 제목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헤어진 가족 간의 혈육의 정과 울부짖음을 목격하고 그 현장에서 자연스레 떠오른 제목이었다. 그리고 키네스타시스(kinestasis) 기법으로 제작할 요량으로 영화진흥공사 도서실에서 당시 기록사진을 해방 이후부터 순서대로 주요장면을 찍었다. 광복, 분단, 점령군 진주, 동족상잔의 전쟁, 휴전, 긴 이별, 의거, 쿠데타, 7.4 공동성명, 평양 방문, 통일의 열망... “통일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자연스럽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작품으로 승화되기 위해서 뭔가 더 필요했다.

나는 살풀이 춤사위를 생각했다. 한국인의 '희노애락'을 가장 잘 표현한다는 춤사위 아닌가? 대학극장 그 큰 무대에서 펼쳐지는 살풀이춤을 찍으며 우리는 흥분했다. 흰 한복의 여인과 살풀이 수건이 함께 엉키고 풀어지고 뿌려지고 당겨지며 찍혀진 그림은 앞 서 찍은 그림과 몽타주되었고 마지막으로 무너지는 철책을 모 처에서 찍어 대미를 장식했더니 그럴 듯했다.

그것에 힘을 불러 넣어 준 분이 이경자 편집기사이다. 영화는 한 편의 시가 되었다. 녹음을 위해 한양녹음실을 갔다. 이영길 녹음기사는 악사까지 섭외해 즉흥 시나위 곡을 붙여주었다. 세방현상소와 영화진흥공사에서 프린트 작업을 했는데 A프린트가 감성적으로 좋았다. 시사 결과 '잘 찍었는데 상 타겠다'는 반응이었다. 열흘간의 작업을 마치고 출품해 ‘제9회 한국청소년영화제’에서 우수상을 탔다.

내 작품을 못 만들어 머리가 굳어져 가는 느낌의 2년을 보내고 받은 상이다. 영화한다고 부모님 걱정을 끼쳐드렸는데 무언가 보여드렸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상금으로 받은 150만 원으로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보렉스 카메라와 12~120mm 안지눅스 줌렌즈를 구입했다. 그리고 1년짜리 대작을 찍을 기획에 들어갔다.

그 때 영화진흥공사의 방충식 선배가 추천해준 분이 임권택 감독이었다. 1983년의 임권택 감독은 지금처럼 알려진 감독은 아니었으나 이미 대감독으로 낙점된 분이었다. 나도 이미 우진필름에 있을 때 촬영 40회를 나가고도 끝내지 않는 <아벤고공수군단>을 통해 익히 그의 명성을 들었던 터라 당연히 그와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임 감독은 “응, 너구나.” 한마디로 반겨주었다.

그 때 임 감독은 문화영화라고 일컬어지는 40분 내외의 중편영화 연출도 했던 때이다. <이명수특공대>라는 국방부 교육영화를 찍으러 광주로 내려갔다. 이 때 받은 캐라가 25만 원이었다. 광주 상무대에서 시작된 촬영은 탱크가 몇 대씩 동원되는 상영시간은 짧지만 대작이었다.

그러나 크랭크인만 한 감독은 일 보러 서울로 가고 손현채 촬영기사와 조감독이 끙끙대며 촬영을 해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이 때 촬영조수가 후에 <올가미>를 찍은 이동삼 촬영감독이다. 추석 전날 내려온 임 감독은 기록장을 들쳐보더니 촬영을 나가자 했고 촬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이 난 연기자들은 NG도 없었고 촬영은 저녁 무렵 끝이 났다. 나는 과연 이 편집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했다. 서울로 올라와 추석을 보내고 김희수 편집실에서 편집이 시작 되었는데 당연한 거지만 신기하게도 그림이 척척 붙었다. 나는 “역시 다르구나” 속으로 감탄했다. 그의 액션영화 연출의 일가견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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