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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 - 필름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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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 - 필름 다큐멘터리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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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춤 살풀이'에 출연한 한영숙 명인
▲ '한국의 춤 살풀이'에 출연한 한영숙 명인

나의 첫 영화이며 다큐멘터리 제작의 기점이 되는 청계천으로 찍은 영화 <폭류>이다. 대학에서 '영화개론' '시나리오 작법' 등을 수강하고 2학년 2학기에서야 첫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무얼 담아내 영화를 만들지는 풀리지 않았고 결국 '만화적 상상력'과 '다큐멘터리'의 경계에 섰다. 지금 생각하니 무거운 짐을 든 심정이었다.

카메라란 얼마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능케 하는가? 또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줄 수 있는 도구였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결국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은 마음에 혼합장르가 되었다. 이중거 지도교수님은 하고 싶은 대로 만들어 보라며 일체를 모두 학생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필름은 충분치가 않다. 지금의 디지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가인 시대였다.

영화의 주제는 인생이고 내용은 나와 나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필름에 담을 소재는 우리의 주변의 일상이다. 제목도 거창한 <폭류>인데 거칠게 흐르는 강물의 의미를 담아내고자 했다. 청년의 일상의 생활을 통해 당대의 아픔을 그려내려 한 단편이다. 이렇게 거창한 주제이니 10분에 담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은 예고됐다.

만들어진 내용이 과연 그것을 보여주었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하여튼 카메라를 가지고 거리로 나섰다. 내가 연출을 맡고 동기생들과 선배가 한 팀이 되었다. 동기생 정태원, 신철성 외에 지금 이름이 기억 안 나는 선배와 캐논 16mm 카메라를 가지고 씩씩하게 거리로 나섰다. 당시를 살았던 분들에게는 기억에 새로울 청계천 판자집촌으로 갔다.

1975년 가을, 당시는 복개가 안 된 청계천 8가에 판자집들이 있을 때였다. 흘러가는 청계천은 구정물 인데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시커먼 동네의 하얀 빨래들로 눈이 아픈 풍경들이다. 그 더러운 강(?)에서도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 놀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어린 시절의 한 단편이기도 했다. 당대의 아픔일까? 사실 그 때는 모두 그렇게 살던 때이기도 하다.

청년의 고민은 흐르는 강물에 쓸려내려간다. 무기력증에 빠진 청년의 모습이 당대의 청년 모습일수도 있다. 10월 유신에 긴급조치로 손발이 묶인 대학생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한 방을 쓰던 사촌형이 집 근처에서 잠복하던 왕십리경찰서의 형사에게 잡아갔던 때였다. 형사는 특진을 했다던가? 지금으로 보면 너무도 먼 옛날 일이다. 너무도 변한 시대를 살고 있기에 더 그렇다.

그렇게 영화는 완성됐다. 소극장에서 시사회를 가졌고 나는 내 생각대로 만들어 지지 않은 첫영화를 보고 씁쓸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의 첫 영화 <폭류>는 그렇게 내게 자양분이 되어 남아있다. 그리고 그 때 못다 만든 이야기를 하기위해 지금도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와의 운명적인 만남, 인생의 항로가 그렇게 풀어져 나갔다. 이후에 만든 다큐는 1983년의 <맥>이다. 당시 빅 이슈였던 이산가족만남은 내게 다큐 본능을 자극했고 카메라를 들고 무조건 KBS 스튜디오로 가게 했고 그곳에서 KBS 맨들과 함께 눈물과 감격의 현장을 잡아냈다.

KBS 스튜디오는 눈물의 바다였고 KBS 스튜디오 밖은 이산가족을 만나겠다는 염원의 도가니였다. 온 국민이 이렇게 하나가 되어 KBS를 시청하고 용광로 같은 사회 현상을 만들어 낸다. 나는 단편 다큐 <맥>을 이 역사의 현장을 담아냈고, 극영화로는 1986년 임권택 감독이 <길소뜸>을 만들었다.

1984년 나는 한국의 5천년 역사와 문화를 한편으로 담아내겠다는 기획으로 <한국환상곡>을 만들었다. 영화제에서 받은 상금으로 16mm 카메라를 장만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직 정식 다큐 감독이 아닌 조감독의 신분이었지만 전국을 찾아다니며 나만의 다큐를 제작한 것이다. 그 시절의 열정이 그립다. 무엇이든을 만들지 못할 것이 없었던 무세운 기세의 다큐멘터리스트가 따로 없었다.

이후 퓨전 다큐이지만 한국여인의 한 평생을 담아낸 <회심>을 만들었고 드디어 다큐멘터리 감독 데뷔작인 <한국의 춤 살풀이>를 감독한다. 시작은 영화진흥공사의 문화영화 소재공모였다. 평소부터 한국춤의 미학에 빠져있던 나는 한국춤의 백미인 살풀이춤의 다큐 시나리오를 제출하여 뽑혔다.

이 공모의 취지는 우수 소재를 발굴하여 각 문화영화사가 추첨하여 제작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직접 제작하겠다고 청원하여 제작을 하게 된 것이다. 제작비까지 온전히 내가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카메라가 있고 제작 의지가 있는데 불가능할 일은 없었다.

우리와 함께해 줄 무용인 이경화 선생을 섭외하고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살풀이춤 기능보유자인 한영숙 명인을 삼고초려로 섭외하였다. 그리고 촬영을 거듭하며 설악산 소승폭포를 찾아가 촬영을 하였다. 폭포수의 물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세 번 만에 OK가 되었다. 욕심은 여기가 끝이 나니라 굳이 대청봉을 떠올려 공룡능선을 배경으로 촬영하고자 했다.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길은 많은 짐으로 인해 조난 직전까지 갔을 정도이다. 감독의 굳은 의지는 팀에게 활력을 불어넣는다. 여러 곳을 누비며 촬영을 거듭하며 한국춤의 영상미학을 추구했다. 그해인 1987년에 영화를 만들었지만 목표로 했던 금관상영화제에서 수상을 하지 못했다. 역시 아마추어와 프로의 세계는 달랐음을 실감했다. 이 영화가 공륜(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으며 결국 나의 데뷔작이 되었다.

결과에 만족치 못하고 <한국의 춤 살풀이>는 한 해를 넘겨 1988년에 <살풀이춤>이라는 제목으로 완성했고 금관상영화제에서 조명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도전정신과 끈기가 결국 180편이 넘는 다큐를 만들게 한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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