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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역사 속으로의 여행, 독도 수호신 안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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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역사 속으로의 여행, 독도 수호신 안용복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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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의 여행, 독도 수호신 안용복' 촬영 현장
▲ '역사 속으로의 여행, 독도 수호신 안용복' 촬영 현장

<독도는 우리 땅>은 노래방 가면 즐겨 부르는 노래이며 우리 민족 모두의 노래이기도 하다. 이 외침은 일본에 대한 우리들의 다짐이다. 이 노래를 부른 정광태 가수는 일본 입국 비자신청까지 거부되었다. 남의 땅을 저희 땅이라고 하는 주장도 고약하지만 역사에 대한 뉘우침이 없는 작태가 어이없다. 2008년 7월 14일, 일본정부는 일본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명시했다.

이 책은 교사용인데 독도영유권 주장을 시작하며 검은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끝없이 독도를 분쟁화 시키는 작태이다. 그들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 직후인 1905년 독도를 다케시마라 하며 자국의 시마네현에 귀속시키면서 부터이다. 이것은 한반도에 대한 자국 영토론과 다름 아니다.

끝없는 망발을 일삼는 이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줄 수 있는 다큐멘터리 한 편을 1996년에 제작 방송하였다. <역사속으로의 여행>이라는 40분 품 다큐멘터리 시리즈 중 <독도 수호신 안용복>편이다. 독도는 삼국유사에 보면 고대로부터 울릉도와 함께 우산국의 영토로 존재해왔다.

또 삼국시대에 신라의 영토로 귀속돼 왔고 노래가사에도 나오지만 지증왕 13년(512년), 이사부 장군의 정벌기록으로도 신라영토임을 잘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왜구와 여진족 등의 침입 때문에 잠시 백성들을 보호한다고 울릉도로 소개시켜 공도(빈 섬)정책으로 비워뒀었다. 그러나 독도와 울릉도 부근 연해야말로 갖가지 물고기와 해초들이 넉넉한 천연의 어장이었기에 동해안과 남해안의 어부들은 조정의 관리들 몰래 이 섬에 들어가 어업활동을 하곤하였다.

이런 조선의 정책에 대해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1618년 오오다니, 무라카와 두 가문을 상대로 울릉도 연해의 조업을 허가해주고 이로 인해 조선과 일본어부들 사이에 충돌이 빈번해지면서 안용복의 활동이 시작된다. 안용복 사건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벌어졌다.

막부의 허가로 인해 일본의 어부들은 물개, 해산물이 많이 사는 황금어장인 독도로 와서 무단히 어업을 했다.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조업 중 이를 알게 되고 무능한 조정의 관리를 대신해 관리복을 입고 대규모 사신단을 구성해 막부를 찾아가 독도가 조선 땅임을 밝히고, 일본어부들의 조업을 금지토록 담판 지었다. 실로 누구도 생각 못 할 대단한 배짱과 우국충정이었다.

안용복은 조선조 숙종 때 동래부에 살던 평범한 어부였다. 그는 동래부에 설치된 일본인 거주지인 왜관을 출입하며 일본어를 배워 일본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의 출생이나 가계에 대해 정확히는 알려져 있지 않고 숙종실록이나 성호사설 등에 일부 남아있다.

숙종 19년 여름,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표류 중 울릉도에 도달한 울산의 어부들이 그곳에 있던 일본의 오오다니 가문의 어부들과 싸움이 있었다. 싸움이 커지자 일본의 어부들은 평화적으로 이야기 하자며 조선어부 대표를 보내라고 유인한 뒤 대표로 뽑혀져 온 안용복과 박어둔을 납치하고 만다.

일본의 오랑도로 납치된 안용복은 오랑도주에게 “울릉도에서 우리나라까지는 하루 거리요, 일본까지는 5일 거리이니 우리나라에 속하지 않는가? 조선인이 스스로 조선 땅에 왔는데 어찌 잡아두느냐”며 당당히 주장을 펼친다.

안용복이 절대 굴하지 않을 것임을 간파한 어랑도주는 안용복을 돗토리현으로 회송하고 만다. 이 곳의 백로주 태수는 오랑도주와 같은 수법으로 안용복을 회유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아예 큼직한 은괴를 안용복에게 주며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문제시하지 말아달라며 사정까지 한다.

그러나 안용복은 “나는 우리 강토 울릉도와 독도문제를 따지러 온 것이지 이러한 은덩어리를 탐내어 온 바 아니다. 바라건대 일본은 다시는 우리의 강토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며 뇌물에 현혹되지 않고 단호히 자신의 의사를 표명한다. 이러한 강경한 태도에 백로주 태수는 이 사실을 도쿠가와 막부에 보고한다.

막부는 안용복의 논리와 기세에 눌려 차후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재발되는 일본어부들의 조업에 안용복은 다시 막부를 찾아갔다. 그는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강력히 주장하여 드디어 막부로부터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이를 가지고 돌아오던 길에 쓰시마도주(對馬島主)로부터도 재발금지 약속을 받아내고 귀국한다.

그런데 조선 정부는 무단히 관리 행세를 하고 “국경을 넘어 이웃나라와 다투는 단서를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안용복을 귀양 조치한다. 안용복의 이후 행적은 어디에고 나와 있지 않다. 다만 독도수호신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이럴 즈음 대마도주는 조선의 도해역관에게 독도에 대한 철회입장을 밝히고 있는 막부의 뜻을 전하고 동래부사에게 서계를 보내어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금지를 약속한다. 그의 활약에 비해 국내의 기록은 부족하다.

그의 기록을 찾아 일본 시마네현을 찾아갔다. 당시 해변에 세운 “죽도(독도)여 돌아오라!!”라는 높게 세운 나무비가 생각난다. 현립도서관에는 당시 안용복 일행의 행차를 볼 수 있는 화첩 『죽도고(竹島考)』가 보관되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사진집과 같은데 세필화로 이들의 행차가 묘사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본이다.

이 책의 촬영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지금은 한국인에게 촬영 허가를 안내줄 책이다. KBS에서도 이 자료를 EBS에서 구입해 사용했다. 이 방송은 1996년 여름에 촬영되었고 10월 1일 방송됐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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