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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역사 속으로의 여행, 한국영화개척자 춘사 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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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역사 속으로의 여행, 한국영화개척자 춘사 나운규'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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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으로의 여행 촬영 모습
▲ 역사 속으로의 여행 촬영 모습

<역사 속으로의 여행>은 역사 속의 인물을 다루다 보니 항시 몇 대 후손들을 인터뷰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주인공의 아들을 인터뷰했는데 바로 나봉한 감독이다. 그 만큼 오래지 않은 역사 인물의 탐구였는데 이 프로그램 이후 영화사 논문도 쓰고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나운규의 사후 60돌을 맞아 기획된 이 다큐는 1997년 2월 25일에 방송됐다. 이 다큐에서는 자료 수집과 영화계, 문화계 인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춘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꼭 소개해야 할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은 필름이 없어 직접 연출해 소개했다.

제작진은 1996년 12월부터 두 달여 동안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상자료원 등을 돌며 춘사가 남긴 27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일대기를 쫒았다. 특히 필름으로 전해지지 않는 그의 대표작 <아리랑>을 당시 원고 원본을 토대로 재연했다.

춘사가 보안법 위반 및 제령 제 7호 위반혐의로 2년간 복역했다는 수형기록표와 그의 여성편력을 설명해 줄 애인이자 영화배우인 유신방, 현방란 등의 사진을 공개했다. 그 외 춘사의 친필엽서, 스틸사진, 육성녹음 등 진귀한 자료들이 소개되며, 윤석중, 전택이, 유현목, 안병섭 등이 춘사를 회상하는 인터뷰가 소개되었다.

제작진은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춘사와 함께 출연했던 북한 인민배우 문예봉, 무성영화 <아리랑>에서 직접 노래를 불렀던 김연실 배우 등이 춘사를 회상하는 내용의 인터뷰 테이프를 소개했다. 이런 예민한 자료들이 소개되며 한 때 안기부 개입설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지금부터 80여 년 전의 한국영화는 어떠했을까? 당시는 조선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일제강점기였다. 일제강점기라도 우리나라였으므로 한국으로 표기한다. 물론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강점당한 상태였으므로 한국이라 함은 대한민국의 약어이면서 대한제국의 약자일 수도 있다.

당시는 영화라는 예술이 도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제작이 활성화 되지 않았을 때이다. 1919년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라는 한국영화 첫 편이 만들어지고 1923년 일본유학을 다녀온 윤백남이 조선총독부의 저축장려 선전영화 <월하의 맹서>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부산에서 일본인이 세운 조선키네마라는 영화사가 생겼다. 1924년의 일인데 이 회사는 형식적으로 주식회사이고 일본에서 기술자들 데려와 영화를 준비했다. 한국시장을 의식했으므로 그들은 일본인 감독에게 우리식의 왕필렬이란 이름을 지어 붙였다. 그의 각본, 감독으로 첫 작품은 <해의 비곡>이었다.

주인공은 주삼손이라는 역시 한국 예명의 일본 배우였는데 예쁘장한 얼굴로 이후 <장한몽> 등의 영화에도 출연한다. 이 영화사에는 이경손이라는 문학청년이 조감독으로 활동 중이었다.그를 찾아 멀리 함경도 회령에서 우락부락한 스타일의 작달만한 청년이 배우를 하겠노라고 찾아온다. 그가 바로 한국영화의 개척자로 불리운 나운규이다.

나운규는 오디션을 보았고 심사위원 전원의 불합격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이경손을 졸라 <운영전>이라는 영화에서 가마꾼 역을 맡아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고 꿈에 그리던 영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제작된 <심청전>에서 심봉사 역할을 맡아 당당히 조역으로 영화배우로 자리를 굳힌다.

그의 이러한 배우로의 신분상승은 오로지 그의 노력과 영화에 대한 열정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남달리 사물에 관심이 많았고 이경손의 시 습작 노트를 빌려 고향으로 가서 한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해 돌아온다. 그 시나리오가 바로 <아리랑>이다. 나운규는 일본인 사장을 설득해 이 영화의 감독까지 맡게 되는데 차마 감독, 주연 모두를 자신의 이름으로 할 수가 없어 감독의 이름만은 제작부장이었던 쓰모리 히데이치의 이름으로 발표한다.

이런 에피소드로 인해 후세의 영화사가들 간에 “<아리랑>의 감독이 나운규냐? 아니면 쓰모리 히데이치냐?”며 공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영화는 1926년 서울의 단성사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은 이 영화를 기억하며 주저 없이 초창기 한국영화의 대표작으로 꼽았다.

이제 모두 돌아가셨지만 1990년대 말까지는 심심찮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분으로는 아동문학가 윤석중 선생이다. 그는 오죽 감동을 받았으면 나운규 감독을 찾아가 2편의 가사를 쓰게 된다. 또 한 분, 김동리 소설가는 돌아가시기 전 「스크린」 잡지에 <아리랑>의 감상문을 투고하였고 대단한 명편이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영화로 한국영화는 지리한 신파조 영화에서 탈피하며 민중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그리고 10년간은 나운규의 독주시대였다. 1937년 타계하기 전까지 그는 영화 흥행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방탕한 생활과 무분별한 출연으로 그 스스로 가치를 떨어뜨렸다. <사랑을 찾아서>, <옥녀>, <들쥐(야서)> 등은 민중들의 이야기로 피압박 민족의 아픔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아리랑>의 명성과는 거리가 먼 영화들이었다. <한국영화개척자 춘사 나운규>를 완성하니 러닝타임이 55분이나 되었다. 40분 기준 프로그램에서 한참을 더 만들었는데 어느 것 하나 뺄 것이 없었다. 한 장면이라도 빼면 안 된다는 전진환 작가를 설득하여 다시 한 편의 다큐 기획안을 쓰니 그것이 바로 <일제강점기의 영화>이다. 너무도 성실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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