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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달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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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달마이야기'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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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이야기' 촬영 현장인 소림사에서
▲ '달마이야기' 촬영 현장인 소림사에서

<달마이야기>는 1997년 부처님오신날 특집이었다. 무엇을 할까? 생각 중에 번뜩 깨달음이 왔는데 <달마>란 화두이다. <달마이야기>는 중국에 정착해 중국선종의 개조가 된 인도승 달마대사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보는 다큐멘터리이다. 중국불교 선종의 시조인 달마대사. 대나무 잎을 배 삼아서 인도에서 중국까지 왔는데 그가 누군지? 왜 서쪽에서 오고 동쪽으로 갔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의문뿐인 선승이다.

달마대사는 인도에서 중국의 소림사로 와 중국에 선종불교를 전했다. 그가 중국과 한국 불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중국과 일본 현지를 직접 취재를 계획했다. 우리나라 선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인 달마도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달마도의 의미를 만봉스님을 통해 알아보았다. 또 일본에 가니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알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달마 홍수였다. 일본인들의 달마 선호는 달마 술까지 만들었고 집집마다 달마상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촬영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까다롭고 예민한 상황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촬영허가료 10만 불, 그것도 제한이 많은데 당국의 허가 없이는 안 된다. 그들의 허가를 기다리다보면 제 날짜에 방송은 불가능하다. 중국에서는 EBS와 업무협약을 맺은 중국 교육방송인 CETV의 협조를 받았다. 그것은 우리가 카메라 없이 몸만 간 까닭이다.

중국으로의 카메라 반입은 지금도 쉽지 않다. 카메라맨인 이윤규 씨는 카메라 없이 처음으로 출장을 왔다. 그들이 사용하는 카메라는 연식이 오래 된 구형 카메라였지만 이윤규 씨에게는 문제될 리 없었다.

늦은 밤에 도착해 포장마차에서 그들과 친해지는 방법은 나의 홍콩영화 사랑을 알려주는 것이다. 홍콩의 대감독인 장철 감독의 이야기를 펼쳐놓자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대감독의 영화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들과 먹던 우동의 맛은 특이했다. 향내로 인해 목 넘기기가 어려웠는데 주는 술을 받아 마시나 곱하기 열 배로 입안에 향내가 진동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넓은 마당에 가득 모여있는 스태프들을 보니 삼십 여 명은 족히 돼보였다. 암만 봐도 모두가 방송인 같지는 않고 누구냐고 물어보니 촬영팀, 조명팀, 제작지원팀, 가이드 등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촬영이나 조명을 하는데 손 하나 까닥하질 않는 것을 보고 공안들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인데 나중에야 우리가 문화재를 훼손하지 않나 보러 나왔다고 들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부지런했는데 6시에 기상했다. 날씨가 워낙 더우므로 일찍 일을 시작하는 관례였다. 일찍 출발해 말로만 듣던 소림사에 도착했다. 드디어 소림사 입구에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CETV 팀이라지만 결국 지방 방송국에 일임했기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중국 측 카메라맨에게 좌로 패닝하면서 대문으로 줌인이라고 주문을 했는데 촬영이 쉽지 않았다. N.G가 계속 반복되며 똑 같은 워킹을 계속했다. 만만디로 정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N.G임이 확실해 보여 지켜보던 이윤규 씨가 카메라를 잡았는데 이건 일도 아니었다. 그들도 능숙한 솜씨에 흠칫 놀라며 이후 이윤규 씨가 카메라를 잡는데 더 이상 관여치 않았다.

그들의 안내로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그들만 가면 만사 O.K였다. 공안원은 필요악이었다. 희한한 일은 조명팀의 임무가 조명을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명분인데 법당 내부를 어떻게 조명 없이 찍을 수 있나? 조명팀과 나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통역을 맡은 윤성규 코디가 난감해하는 사이에 이윤규 씨는 촬영을 마쳤다.

만만디 점심을 먹고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산을 올라 달마대사가 도를 닦은 달마 동굴을 찍었다. 이미 가짜 스태프들은 낙오를 했고 우린 촬영을 마쳤다. 이 날 근처의 등봉에서 숙박을 했다. 그 많은 스태프을 거느린 나는 장철 감독이 부럽지 않은 대감독이었다. 촬영팀 규모로만 봐서인데 이들의 모든 비용을 우리가 부담하는 것이 계약 조건이다. 당시만 해도 물가가 저렴해 다행이었다.

공안들로 해서도 많은데 방송사 소속의 스태프도 많았다. 철저히 분업화 되어 자신의 일만 하는 것도 좋지만 그 많은 인원이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내 생애 그렇게 많은 스태프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 사정은 도심의 식당에 가서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식당 입구부터 문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여성들이 서 있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손님 반, 종업원 반이다. 그야 말로 사람 천지이다.

다음날 소림사 무술 선발팀의 묘기를 찍었는데 영화에서 보던 것 이상의 실력들이었는데 모두가 무술배우 이연걸 이상의 수준이었다. 사하촌(절 아래 하숙촌)에서는 소림사 입문을 기다리는 수많은 어린이 무술가 지망생들이 맹수련을 하며 대기 중인데 한국학생도 한 명 있다는 애기를 들었다. 북경 서커스에서 보여주는 소림사 선발팀의 묘기들은 엄선을 거친 대표들이기 때문이 아닌 오랜 수련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림사를 떠나 정주에서 북경을 거쳐 촬영 테이프를 갖고 귀국했다. 그 쪽의 방송 녹화방식이 우리와 다른 PAL 방식이기 때문에 컨버팅을 하고보니 아무래도 화질이 안 좋았다. 카피로 인한 화질 저하가 아닌 녹화방식 때문에 오는 차이였다. 공동제작은 이래저래 힘들다는 것을 실감했다.

픽스(고정) 샷은 그래도 괜찮았으나 무빙 샷은 아무래도 프레임이 떨리어 편집에서 상당부분 픽스 샷을 썼던 기억이 있다. 결국 이 후의 중국 촬영은 통관이 허용되는 6mm 카메라로 직접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밤샘편집을 하고 일본 동경으로 가서 일본에서의 달마문화 부분을 촬영하고 부처님오신날 특집 <달마이야기>는 5월 14일 45분 품으로 방송되었다.

지금은 사드 사태로 인해 아예 모든 것이 차단되어 있다. 언제 다시 예전처럼 촬영을 할 수 있을까? 힘들었던 그 시절이 그리운데 부디 원만한 해결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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