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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기획-'표해록'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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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기획-'표해록'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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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청사초롱과 홍등' 촬영 시 영파로 가는 중에
▲ 2007년 '청사초롱과 홍등' 촬영 시 영파로 가는 중에

이 다큐멘터리는 중국 취재를 하던 중 듣게 되어 절강성 영파시 현장을 둘러보고 촬영까지 해두었다. 귀국 후 기획안을 써두었으나 아직까지 제작이 안됐다. 중국을 또다시 촬영가기가 어려워서 일까? 후에 EBS의 <역사채널e>에서 삽화로 그려져 방송됐다.

2007년 9월 25일, 중국의 잡화도매 시장으로 알려진 이우시에서 영파를 향해 출발했다. 영파는 조선조 성종 때 <표해록>을 쓴 선비 최부(崔溥:1454~1454~1504)가 풍랑으로 중국까지 표류해가 체포된 곳이다. 당시 조선과 일본에 사신을 보내던 장소이기도 한데 해류가 서로 연결되는 곳이다.

최부는 체포되어 중국황제를 알현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데 60여 일간에 걸친 중국대륙을 여행기를 책으로 남긴 것이다. 2002년에 영파시 희망(희왕)소학교 교정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처음에는 두 시간을 예정하고 오후 1시에 출발하였는데 기념비가 있는 영파까지 도착하니 이미 5시이다. 다시 희망소학교를 찾느라고 봉화(펑화)시를 거쳐 다시 영파를 찾아가니 한 시간이 흘렀다.

희망소학교가 있다는 지명을 전화로 물어물어 찾아도 역시 한자 지명은 찾기 어렵다. 중국발음의 한문은 여러 글자이기 때문에 물어서 찾아가기에는 혼선이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한글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다. 시간을 보내다가 지나가던 공안에게 물어 택시를 앞세우고 희망소학교를 찾아가니 이미 해가 저물었다.

교정의 기념비는 HD카메라 촬영은 못하였지만 디지털 카메라로는 촬영을 하였다. 결국 답사만 잘 한 셈이 됐다. 돌아오는 길은 빨랐다. 차량기사도 길을 잘 모른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만 최선을 다한 것이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늦은 식사를 하고 숙소에 도착하니 자정 즈음이었다. 귀국 후 쓴 기획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표해록(漂海錄)>은 조선 선비의 149일간의 표류 기록이다.

조선 성종 때의 문인 최부가 쓴 <표해록>은 당시 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중국 강남 지역에 대한 정보의 보고이다. 북경대학 거전자(葛振家) 교수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하멜의 <하멜표류기>와 함께 세계 3대 중국 견문록으로 손꼽았다. 조선시대에 이미 일본에 번역되어 상업출판이 될 만큼 인기 있는 작품이었으며, 미국, 중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는 세계적인 여행기이다.

<표해록>은 뛰어난 여행기이면서 당시 중국에 대한 최고의 정보를 담고 있으며, 149일간 중국을 떠돈 최부 일행의 고난을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 최부는 이때의 체험 이후 조선에서 중국에서 본 수차 등을 이용해 조선에 경제적 혁신을 이루려고 노력하였으며, 세계화에 대한 싹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표해록>은 그때까지 우리나라 방송에서 소개된 적이 없다.

◆ <표해록>의 기획배경

조선의 문인 최부는 1487년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 부역이나 병역 기피자, 도망간 노비를 잡아오는 임무를 띤 관리)로서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최부는 성종 때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도 참여한 당시의 엘리트 관료였다. 그런데 최부는 이듬해 정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배를 마련하여 일행 42명과 함께 고향인 전라남도 나주로 향했다.

그러나 배는 심한 풍랑을 만나 13일간 표류하며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을 견디며 고생을 하다가 도착한 곳은 고향 나주가 아닌 중국 절강성 영파부(寧波府)였다. 중국에서는 왜구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며, 해적을 만나 죽을 고비도 넘기면서 황제가 있는 북경으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의 중국 곳곳의 체험을 현장감 넘치는 언어로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북경으로 가기까지 최부 일행은 수백 개의 역참을 지났는데, <표해록>에서는 이 지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북경에서 중국 황제를 만나게 된 최부는 중국 관리와 실랑이를 하게 된다. 최부는 부친상을 당했기에 상복을 입고 황제를 만나겠다고 하고, 중국 관리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예복을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참 실랑이 끝에 예복을 입고 황제를 만나 선물도 받는다. 중국 관리도 얻기 힘은 영광이었다.

황제를 만난 후 최부는 병이 들어 움직이기 힘들었으나 수레에 몸을 싣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1488년 4월 24일 북경을 떠나 산해관과 요동을 거쳐 압록강에 도착한 때는 6월 4일, 그리고 6월 14일 마침내 조선의 수도 한양에 도착한다. 최부는 중국에서 돌아온지 8일 만인 6월 22일, 5만자 분량의 <표해록>을 지어 왕에게 바친다.

이 저술은 1569년에 최부의 외손자 유희춘(柳希春)이 처음 책으로 간행하였고, 1578년에 다시 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1769년 기요타 기미카네(淸田君錦)가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하였으며, 1965년에는 미국의 J.메스킬 교수가 영역하였고, 북경대학 거전자 교수가 중국어로 번역하였으며, 1975년 최기홍(崔基泓)이 국역하였다.

이에 관한 연구서로는 1995년 거전자의 『최부표해록연구』가 있으며, 1995년 6월 북경 사회과학원에서 한·중·일 학자 14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부표해록연구출판좌담회’가 열렸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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