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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방송프로듀서라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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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방송프로듀서라는 직업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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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EBS 퇴임을 앞두고
▲ 2013년 EBS 퇴임을 앞두고

방송 프로듀서라는 직업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좋은 직업으로 통한다. 실상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실속 없는 직업인데 외견상 그럴 듯해 보이는 직업이다. 오히려 부탁받을 일만 많다. 크게 도움이 안되지만 카운셀러로서 넋두리라도 들어달라는 식이다. 의학다큐 <명의>를 하며 '누가 아픈데 명의 좀 소개해 달라' 식인데 사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 많은 명의를 다 아는 것도 아니거니와 홍보팀 통해서 소개 정도해주는 정도다.

그러나 딱히 해결되는 것도 별로 없고 그저 월급쟁이로서 해야 할 일인 취재, 편집 등의 작업으로 시간이 부족하니 늘상 전화로 만나는 것을 대신하게 되고 듣는 소리라곤 “외국 다녀왔냐?”는 힐난조의 말뿐이다.

그러나 프로듀서는 사실 좋은 점이 더 많은 직업이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 말 저 말 듣다보면 아는 것도 많아지는데 주로 세상살이에 도움 받는 것 보다는 도움 안 되는 것을 많이 알게 되는 직업이기도 하다. 내 경우에만 그렇겠지만 일단은 재미있는 직업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도 적성에 맞아야 재미있지 그렇지 않다면 질리기에 딱 알맞은 일이다.

계속되는 취재일이란 범인을 잡으러 다니는 형사 일과 다를 바 없고 매일같이 시신과 마주해야 하는 국과수의 부검의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 분들 모두 자기 직업에 대한 자긍심으로 일속에서 보람을 찾듯이 프로듀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을 밝혀내는 일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여론화 시켜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이보다 보람된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1990년에 안중근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안중근의 유해찾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20여년 수소문 끝에 결국 유해찾기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다. 나로선 소 뒷걸음질 치다가 걸린 행운은 아니다. 20여 년이란 긴 세월 사람도 만나러 다니고 중국 땅도 기웃거려보고 현장도 찾아가고 낯 선 산야를 헤맨 결과다.

나는 2004년, 2007년 긴 중국 취재기간 안 의사 루트를 따라 갔었다. 그러나 안 의사 매장지를 찾는 일은 처음부터 제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증거라고 무엇이 있겠는가? 평생을 안 의사 매장지를 추적한 고 김영광 전 의원도 결국 증언자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도 감옥소장 딸이 제공한 사진 한 장에 승부를 걸었다가 허탕만 치고 말았다.

그러니 낯선 중국 땅을 기웃거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나도 김영광 전 의원을 만나 실마리가 풀렸다. 그는 꽤나 많이 자료를 모았고 신뢰할 수 있는 인사를 찾아내었고 그들에게서 증언을 들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고 나는 덕분에 좋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닌 것이다. 김영광 전 의원은 뜻하지 않게 타계하였고 김 의원의 자료를 모두 본 나는 본의 아니게 큰 숙제를 맡은 셈이다. 그러나 나는 즐겁게 신나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토록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즐거이 일하고 있다. 모든 프로듀서가 나와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 내가 프로듀서이기 때문에 이런 운명적인 길을 걷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안 의사 뼈대찾기(유해발굴)일을 시작했고 네이버에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카페를 만들었다. 때로 이런 삶의 목표를 만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제 내게 그 기회가 왔으니 누구보다 열심히 이일을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다.

나는 PD로 일하며 청년의 마음을 갖고자 노력했다. 청년에게는 청년의 마음인 청년다움이 있다. 2011년부터 제작했던 <어린이 모험극 스파크>는 어려운 상황에서지만 의미 있게 제작한 드라마이다. 그중에서도 안중근 편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안 의사 의거 백주년을 맞아 안 의사의 순국일에 맞춰 방송이 나갔다.

처음 안중근 편을 기획하자 지원 스태프들이 난감해 했다. 미술관련 스태프들인데 특히 소품팀이 결사 반대였다. 총격전이며 하얼빈 역을 어떻게 재연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내가 1990년에 이미 한번 연출한 경험이 있는지라 생각보다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전후 상황을 설명하며 설득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였다.

'안된다'는 처음의 답도 한두 번은 그렇다 쳐도 계속 반복되는 볼멘소리에 나는 오기가 발동했다.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오기이다. 나는 지원스태프들을 모아놓고 ‘청년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청년의 마음’은 모든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말이다. ‘청년’이 되어 일하자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촬영은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총격전은 물론이고 하얼빈 역까지 금곡역에서 재연하여 무난히 제작을 마쳤다. 힘든 것을 이야기 한다면 사실은 내가 제일 힘들 일이다. 군복을 바꿔 입혀가며 총격전을 몰아찍기로 찍고 금곡역사 뒤로 보이는 빌딩을 피해 촬영해야 한다. 그리고 O.K샷을 편집하고도 다시 쳐내야 하는 아픔까지 힘든 일이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제작을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자신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뭐가 그리 안된다고 반대하는지 각본을 쓴 황 작가와 나는 “우리가 너무 무모한 일을 벌리나?” 싶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우리는 안 된다고 하는 걸 너무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그만큼 해내고 느끼는 쾌감과 자부심 또한 컸다. 그러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 할 수 있다는 각오가 중요하다.

그즈음 난생 처음으로 예능 프로그램인 어린이동요제를 연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출경력 30년에 못할 것이 뭐가 있겠나?'하는 자부심이 나를 부추겨준다. 물론 작가며 연출팀, 스태프들이 나의 버팀목이며 든든한 후원군이다. 안된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청년이 왜 좋은가? 그들에게는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패배를 두려워 않는 도전정신이 있고 그런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주변을 보면 요즘 청년들 중에는 청년다움이 없는 청년이 많고 그런가 하면 청년 못지않은 패기의 노년도 많다. 청년들은 예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다. 시대가 예전 같은 치열함을 요구하지도 않거니와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패기 대신에 꽃미남이 미덕이 된 까닭이리라. 시대가 변해도 나이가 들더라도 매사를 청년의 마음으로 임한다면 어디 못할 일이 있을까. 청년의 마음은 우리 사회의 영원한 동력원이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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