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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 - 중국 촬영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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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 - 중국 촬영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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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특집 다큐멘터리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 EBS특집 다큐멘터리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벌써 25년 전의 일이다. 1997년에 '소림사'를 다녀온 중국 촬영에 대해 기억해 본다. 일찍이 중국을 가려고 1990년인가 보안교육을 망우리 쪽 가서 받은 기억이 난다. 중국 북경에서 케이블TV 부사장을 거쳐 지금은 귀국한 진양프로덕션 박운양 사장과 함께였는데 대충 호텔방에서도 말 할 때 조심하고 적국민을 만나면 안 된다는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만 해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였는데 조금 오버한 교육이었다. 사람들이 하품하는 교육은 잘못된 것이다. 요즘은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중국 촬영은 <해란강아...>라는 다큐 때문이었고 부산까지 가서 원작자를 만났는데 그만 중단되었다.

비수교국인 중국 본토를 밟기 전까지 대만, 홍콩을 다녀왔다. 중국 대신이라고는 하지만 볼거리도 풍성하였고 여행이 주는 재미가 많았다. 대만은 고궁박물관 관람이 압권이었다. 당시 EBS의 전통문화 프로그램 <여성장신구>를 찍던 중이었는데 한국의 여성장신구가 갖고 있는 한국의 미에 감탄을 했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만난 중국의 여성장신구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쌀 한 톨에 한문자를 수백 글자를 새기는 그 섬세함으로 만들어 낸 중국의 문화유산은 정말 대단했다.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가 못생겼다고 어머니가 아닌가? 나는 우리 여성장신구만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프로그램에서 얘기했다. 어쨌든 박물관은 많이 다녀볼 일이다.

홍콩은 내가 좋아하던 장철 감독이 활동하고 꿈의 영화공장인 쇼브라더스 본사가 있는 곳이다. 2007년에 방문한 청수만 바닷가 근처에 자리한 쇼 본사는 싱가포르에 있고 홍콩 쇼브라더스는 TVB라는 TV회사로 변했다. 예전의 스튜디오 자리는 지금 후반작업 스튜디오로 재개발되었다. 영화로만 보아오던 스튜디오의 위용을 보고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동양의 할리우드로 자리매김하고 번화하고 한번 왔던 사람들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인상이다. 그래서 신상옥, 정창화, 장일호 감독을 위시하여 남석훈, 성훈, 윤일봉, 김기주, 홍성중 등의 배우가 와서 오랜 기간 활동을 했던 곳이구나 싶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정창화 감독에게 팬레터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의 답신을 기다리며 중국어 책을 샀다. 그의 답신이 있었고 인연이 시작되었더라면 나의 신분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내가 홍콩에서 영화감독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홍콩영화를 지독히 사랑하고 중국어를 배우던 준비된 학생이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중국 CCTV의 기술 스태프와 함께 협작(협동제작)했던 1997년 봄 <달마이야기>로 처음 중국 촬영에 나섰다. 정주를 거쳐 소림사에서 촬영하고 달마대사가 면벽했던 동굴을 촬영했다. 중국은 수교 후 개인적으로 다녀왔기에 초행길은 아니었다. 당시 거리를 채운 초록색 군복 물결에 놀라기도 했는데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리보다 앞선 경제 대국 아닌가? 엄청난 빠른 발전이 부럽기만 했다.

같은 해 여름에 <일제강점기의 영화> 촬영 차 북경 및 상해를 다녀왔다. 일제강점기의 조국을 떠나 상해로 와서 정기탁 감독 등 한국영화인들이 만든 영화는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인 <애국혼>이다. 당시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그를 발굴해낸 의미 있는 다큐였다. 북경 필름보관소에서 <애국혼>의 스틸 및 그의 유작 <상해여 잘 있거라>를 찾아낸 것은 그야말로 쾌거였다. <달마이야기>와 <일제강점기의 영화>의 촬영을 도와준 윤성규 코디를 잊을 수 없다.

2004년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50분 3부작 촬영 차 중국엘 갔다. 한 달 안 되게 체류하며 중국의 여러 지역을 다녔다. 그러나 역시 대륙은 넓었다. 나는 촬영감독을 해남도로 보내고 헤어져 따로 촬영을 다녔다. 고화질 6mm 카메라를 2대 갖고 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내를 맡았던 연변대 김 교수의 열정이 인상적이었다.

CCTV와 공동제작 했던 2007년의 <청사초롱과 홍등>은 중국에서 100일 넘게 촬영하며 중국어가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였다. 11월 3일에 귀국하여 밤새워 가며 편집하여 완성을 하였다. 11월 말까지 30분 10부작을 만들어 중국 측에 전달했더니 담당자도 내심 놀라 쳐다보았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를 알고 있었겠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가 놀라지 않을 속도로 완성을 했다. 비결은 귀국 전 미리 촬영 테이프 및 취재기를 보내 작가들이 사전 작업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십여 일 넘게 편집실에 갇혀 내 몸과 영혼이 생고생하였다. 끊었던 술과 담배 생각이 간절하였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다.”라는 생각으로 버텨냈다.

2009년 <안중근 순국백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촬영차 대련시 여순일러감옥구지박물관을 찾았다. 이곳 감옥묘지에 안 의사의 유해가 묻혀있다는 증언자 이국성 씨와 함께였다. 당시만 해도 여순감옥을 들어가 공식적으로 촬영하지 못했다. 우리는 안 의사의 묘 추정지 앞에서 인터뷰를 하며 가슴 벅참을 억눌렀다. 방송은 나가고 정작 국가보훈처는 그 사실을 외면하고 시간만 보내다가 사드 사태를 맞아 유해 발굴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서 조선족 상대로 역사, 사상, 정체성, 문화 논쟁은 불가하다. 그것은 한국에 사는 그들과도 마찬가지이다.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것을 바꿀 수는 없다. 우리끼리도 화합이 안 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연변을 처음 가서 한글간판을 보고 무심코 “여기 한국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가 당 간부인 조선족에게 “어떻게 여기가 한국 같냐?”고 힐책을 들었다.

그때서야 그가 중국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념이란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는 국가의 존재 이유이다. 같은 민족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보고 배우며 굳어진 사상을 감정에 따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 할 수는 없다. 그저 수긍하며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

중국은 우리 역사의 현장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 땅에서 항일운동을 하였고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북한을 도와 한국전쟁으로 영구 분단을 조장했던 모택동을 국민영웅으로 받드는 나라이기도 하다. 중국을 마지막으로 다녀온 게 2017년이었다. 사드 문제로 양국의 관계는 과거와 너무도 달라졌다. 빨리 정상적인 외교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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