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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 섭외가 끝나면 제작은 일사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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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 섭외가 끝나면 제작은 일사천리다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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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순국 백년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라'의 한 장면
▲ '안중근 순국 백년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라'의 한 장면

프로그램 제작에서 섭외가 끝나면 제작은 반이 끝난 것이며 향후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며 속도가 붙는다. 그를 통해 더 많은 인사가 추천되며 심지어는 그가 직접 전화를 하여 섭외까지 해준다. 그야말로 인맥을 잡는 것인데 술술 풀려가는 것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다. 이후 촬영이 원활한 것은 두말 할 나위없다.

그의 섭외와 인맥의 소개로 프로그램은 심도 있는 내용이 된다. 그가 갖고 있던 자료는 모두 전달되어 프로그램 내에 소개되고 안개 속에 숨어있던 사건의 진실은 낱낱이 파헤쳐진다. 이런 행운이 어디 있을까? 나 혼자 20년을 뛰어서도 밝힐 수 없었던 사실이 한 인사를 만나면서 술술 풀려져 나간다.

이쯤이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싶은데 나를 아시는 분들은 감을 잡을 것이다. 바로 <안중근 유해를 찾아라!> 때의 사례다. 평생을 안 의사의 유해발굴을 위해 헌신한 故 김영광 의원과의 만남 이야기인데 그를 통해 1958년에 안 의사의 묘를 참배했던 이국성 증언자도 만났다.

그리고 故 김영광 의원의 자료를 통해 1943년에 안 의사의 묘를 참배했던 故 신현만 증언자의 안 의사 매장지 지도도 촬영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안 의사 묘 위치가 이구동성으로 같았음은 두 말할 나위없다. 나로서는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 여러 검증을 거쳤는데 그들의 증언은 확고부동한 진실이었다. 이런 행운이 어디 있을까? 그동안 나도 故 김영광 의원처럼 안 의사의 묘를 추적했었지만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1990년에 처음 안중근 의사의 다큐멘터리 <대한국인 안중근>을 만들었다. 그때는 안 의사의 일생을 조명한 내용을 만들었는데 그때도 이슈가 안 의사의 유해발굴이었다. 그러나 안 의사의 유해가 어디 묻혀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보가 없이 그의 묘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후 중국과 수교가 되어 여순을 찾았지만 그때도 여순은 해군기지가 있는 군사도시라서 외국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규제되었다. 시간이 경과되어 중국인 행세를 하며 여순 감옥을 들어갈 수 있었으나 촬영은 엄두도 못 내었다. 그리고 여순 감옥 뒷산을 누볐으나 그것은 북한산에서 어느 묘를 찾는 것과 같다. 그 넓은 여순 감옥 뒷산 어디에서 안 의사의 묘를 찾는다는 말인가?

2010년에 가서야 겨우 감옥 내 촬영을 하였으니 참으로 긴 세월 여순을 짝사랑한 꼴이다.결국 두 증언자의 지도와 인터뷰를 통해서 안 의사의 묘 위치를 확인 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이국성 증언자와 함께 현장을 찾았고 프로그램은 완성되어 2010년 3월 26일 방송되었다. 그리고 PD 연합회에서 주는 이달의 PD상을 수상하였다. 시상이유는 프로그램의 진정성을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해 주무부처인 보훈처에 제보하고 방문하였으나 지금도 보훈처에서의 연락은 없다. 그래서 과감히 나서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를 만들고 안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고자 나섰으나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우리 사업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신 분은 당연히 故 김영광 의원이다. 내가 만난 인사 중 이렇게 귀한 만남은 아직 없다. 글을 쓰다 보니 그때의 일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2004년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시리즈도 마찬가지였다. 국민대 장석흥 교수가 이끄는 해외한인귀환사 연구팀과 협의하며 해외촬영 스케줄은 자연스럽게 나왔고 각국 별로 전문가 팀이 구성되었다.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타국으로 나간 한국인은 약 500만 명인데 그들이 간 나라만도 7개국 이상이다.

그중에서 우리가 촬영할 나라로는 일본과 중국,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러시아, 그리고 미국이었다 이들 나라에 징용, 징병되거나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고 포로감시원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군 따라 간 이들이 갔던 나라들이다. 종전 후에는 전범 재판에 의해 수형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했다.

피지배 민족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희생되어간 그들이다. 그들 중 반 수이상이 현지에서 목숨을 잃거나 잔류했다. 돌아올 고국의 상황이 현지보다 못했던 상황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잔류해야만 했던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사할린의 경우에는 “너희들은 너희 나라 배가 와서 싣고 갈 거다.”라고 이야기하고 귀환선에 일본인들만 태우고 떠났다. 데려올 때는 일본인이고 패전 후에는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논리이다.

중국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비참한 삶을 살았던 어는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도 기억도 모두 잊어버렸다. 현지에서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며 지금은 한국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이국민이 되었다. 싱가포르 창이형무소에 수감되어 전범으로 판결 받고 사형당한 이들도 부지기수이다. 이런 말로 다 표현 못할 참상이 전쟁 전이나 전쟁 후에 벌어졌다. 내 조국을 잃고 해외로 나간 이들의 말로이다.

이들이 전 세계 700만 한인동포의 뿌리가 된다. 1980년대 이후 자발적인 이민자들이 늘어났지만 그 이전에 이들과 이들의 후손이 한인동포의 주류였다. 이들의 아픔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어떠한 보상도 이들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다. 한민족의 후손으로서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은 재외동포라는 이름으로 조국 저 멀리 이국땅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만 간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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