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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 인도네시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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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 인도네시아 촬영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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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시아 외무부에서 발급한 촬영 허가증(왼쪽)과 허가증만으로는 촬영을 할 수 없다는 군인(오른쪽)
▲ 인도네시아 외무부에서 발급한 촬영 허가증(왼쪽)과 허가증만으로는 촬영을 할 수 없다는 군인(오른쪽)

2004년 4월 6일(화) 오후 4시 영상팀의 강한숲, 김범석, 경성대의 김인호 교수와 함께 자카르타 취재를 떠났다. 서울에서 6시간 40분 만에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태평양전쟁 시기 인도네시아에 대해 연구했거나 답사를 다녀온 연구자는 공식적으로 없었다.

우리는 일본의 우즈미 아야코 교수가 20여 년 전에 쓴 답사기 『적도에 지다- 적도하의 조선인 반란』과 논문 「일제의 한국인 B·C급 전범」에 의존해 촬영을 떠났다. 김인호 교수는 우즈미의 책을 번역하고 있는 역사학과 교수였고, 그 역시 태평양전쟁사 연구가였다.

4월 7일(수) 촬영 시작 전 정부 외무부로 가서 촬영허가증을 받았다. 현재의 대통령궁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제 16군 사령부 터였다. 자바주둔군 총본부로 사령관은 이마무라 히도시(今村均) 중장이었다. 1942년 3월 8일 연합군 항복 후 포로 8만 여 명(반둥 3만 명)의 감시원으로 한국인 400명이 반둥에 투입됐다. 자바 전체에는 1,400명이 투입됐다.

모나스 광장(monument nasional) 독립기념탑을 촬영 후 딴중브리옥 항구로 왔다. 1942년 8월 17일 부산을 출발한 포로감시원 1400명의 상륙처이다. 찌삐낭 형무소는 BC급 전범 61명이 1947년 11월부터 1950년까지 2년 여 동안 수감되었던 곳이다. 그들은 종전 후 1950년 동경 스가모 형무소로 이송됐다.

4월 8일(목) 자카르타를 출발해 반둥으로 가는 길. 장대 같은 스콜이 적도에 쏟아져 내린다. 오늘 첫 촬영지는 치마이 포로수용소이다. 현재도 군감옥소로 사용되고 있는 1887년에 지어진 네덜란드식 건물로 자카르타 포로수용소 반둥분소 치마이 분견소(분소 및 수용소)였다. 우리는 촬영 제지를 당하고 멀리서 망원렌즈로 당겨 찍다가 급기야 붙잡혀가 실강이 끝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군 총사령관의 허가증을 요구했다. 외무부의 촬영허가증은 무용지물이었다.

두 번째 장소인 가룻 독립영웅묘지공원은 이름에 비해 초라한 묘지이다. 포로감시원 양칠성과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아오이 마시로, 하세가와 가츠오가 나란히 묻혀 있다. 그들은 1945년 10월경, 인도네시아의 게릴라로 변신해 1946년 6월 반둥에서 활동했는데 1947년 10월 갈준산에 입산해 투쟁하다가 1948년 11월 네덜란드군에게 체포되어 사형 당했다.

일제에 의해 끌려 온 포로감시원이 한국으로의 귀국을 거부하고 일본군 패잔병과 함께 연합군에 대항해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인도네시아 독립의 영웅이 된 아이러니한 케이스이다. 1967년 네덜란드군 사령부에서 현위치로 이장되었다.

4월 9일(금) 인도네시아 최대의 요새인 반둥요새, 다고 지역을 촬영하였다. 네덜란드군 전방총지휘소 겸 요새였다. 네덜란드군이 42년 3월 7일 경 사카구치부대에 무저항으로 항복했던 곳이고, 전방 총지휘본부 및 반둥 내 네덜란드군 주둔지는(치마이 포함) 모두 포로수용소로 변했다. 포로들에게 가장 인간적 대접 해준 곳(약 3만 명 수용)이기도 하다는데 악질 감시원으로 불리운 카사야마(이의길)가 여기에서 근무하다가 안본 섬 포로학대 사건으로 결국 사형된다.

1944년 억류소가 된 후 약 400여 명의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있었다. 인공굴로 연결된 어마어마한 요새는 포로들로 가득 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포로감시원들 조차도 탈출은 엄두도 못낼 정글에 갇혀 있었다.

오후 브랑묘지의 후융(한국명 허영)의 묘를 찍다. 수많은 묘들 사이에서 그의 묘를 찾기에 난감해 하고 있는데 사진을 본 청소년들이 따라 오라고 해 갔더니 거짓말처럼 그곳에 묘가 있었다. 후융은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의 이름으로 살다가 인도네시아에 정착해 인도네시아 영화의 아버지가 된 기묘한 인생역정의 인물로 이곳 묘지 한 켠에 묻혔다.

허영의 본적은 함남인데 일본군 선전대원으로 와 종전 후 귀국을 않고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의 초석이 되었다. 친일 한인의 또 다른 말로를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나 할까. 인도네시아 청소년들은 외국인에게 무척 친절하다. 10명 이상이 모여 있다가 외국인들만 보면 환호하는데 이런저런 친절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돈으로 해결된다.

4월 10일(토) 호텔을 일찍 나서서 9시25분에 인도네시아 국내선 스마랑(semarang)행 비행기를 탔다. 왕복요금이 4만 원 정도로 50분이 소요된다. 밝은 웃음으로 맞아주는 스마랑 운전기사의 미소만큼이나 밝게 펼쳐지는 가장 인니적인 풍경이었다. 녹색의 자연속의 도로를 달려 당시 군부대인 스모우노 교육대에 도착했다. 첫눈에 띠는 게 경비초소인데 세트마냥 서있고, 지금도 부대로 사용되며 한가로운 군인들이 간간이 눈에 띤다.

인도네시아는 촬영이 여의치 않은 곳이다. 우리는 먼저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선 목표 답사를 마치고, 몰카로 멀리서 다른 곳의 풍경부터 담아냈다. 우즈미의 답사기에 의하면 이곳에서 3인의 코리안이 고려청년독립당을 결성하기로 계획하고 총기를 탈취한 항일의거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암바라와 성당을 스케치하고 신부님이 불러준 마을 원로인 빼가림(PGARIM, 1933년생으로 교사이다. 일본인이 부를 때 ‘쁘리므コ リ ム(?)’라 한다)과 위나르디(F.WINARDI, 1935년생으로 전직군인이다)씨에게 당시의 상황을 인터뷰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서로 이해를 못했다. 그래서 일본인이 한국인한테 감정이 많았다. 한국인은 얼마 없었고, 그래서 서로 싸웠다. 나는 너무 어려서 잘 몰랐고 부모님한테 들은 얘기다.”

세 명의 한인들이 일본군과 싸웠다는 증언이다. 당시 포로감시원인 민영학 일행 세 명은 브랑마디 고갯길에서 차를 탈취하였고 그 후 일본군과 교전 후 자살했다고 한다. 우리가 모르는 각양각색의 사건들이 80여 년 전 이곳에서 있었다. 언젠간 제대로 밝혀내야 할 사건이다. 스마랑에서 숙박하며 김 교수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오늘 그 노인들의 인터뷰를 마치고 후일담으로 했던 3인의 코리안 이야기는 가치가 있는 증언이라고 의견의 일치를 보고 내일 다시 인터뷰하기로 했다.

4월 11일(일) 아침에 일본군 38사단 사령부 촬영을 하고 위르나디 노인을 찾아가 쓰리 코리안의 기억에 대해 추가 인터뷰를 했다. 시간을 당겨 공항으로 갔으나 벌써 항공기의 표가 매진되었단다. 차를 빌리나, 긴 기차여행을 하나 고민하는데 코디가 자신의 표는 못 구하고 스태프의 표만을 구해 왔다. 가까스로 3시 비행기를 타고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코디는 열차편으로 낼이나 도착한다.

4월 12일(월) 인도네시아 서쪽 끝에 있는 팔렘방 제 2분소는 810명의 조선인 기술병이 비행장건설노역 포로들의 감시원으로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그곳을 가기엔 이 나라가 너무 길다. 일정대로 싱가포르 행인데 국제선 여객기가 2시간동안 순연되었다. 그러나 자세한 설명도 없고 따지는 사람도 없다. 우리도 그러려니 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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