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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잊지않겠습니다] 이소룡 탄신 82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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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잊지않겠습니다] 이소룡 탄신 82주년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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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홍콩에서 발행된 기념우표
▲ 2020년 홍콩에서 발행된 기념우표

오늘이 이소룡 탄신 82주년이다. 참 빠른 세월이다. 벌써 그렇다니 정말 유수 같은 세월이다. 이소룡은 배우였던 아버지가 공연차 1940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그곳에서 태어나 홍콩으로 와서 아역배우로 활동했다.

그의 청소년기는 백인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 시기 그는 무술을 익혔고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미국에서도 그의 노력은 그치질 않았다. 그의 타고난 도전정신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거친 도전과 가난이라는 시련이 있었지만 그는 결국 이겨냈다. 미국 드라마에 출연하며 자신을 서서히 알려 나갔다. 그는 결국 홍콩에서 찾아온 나유 감독의 부인인 류량화와 출연 계약서에 사인한다.

1971년에 태국에서 촬영한 <당산대형>은 홍콩의 영화 흥행기록을 경신하고 그는 우뚝 선다. 이어 출연한 1972년작 <정문문>은 그의 최고작이다. 이 영화 역시 홍콩영화 흥행기록을 경신했고 자신의 프로덕션을 설립해 1972년에 <맹룡과강>을 감독 주연한다. 이 영화도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면서 그는 <사망적유희>라는 희대의 제목으로 신작의 촬영을 시작한다.

그때 할리우드에서 합작제안이 들어오며 1973년에 그의 유작이 된 <용쟁호투>에 출연한다. 그리고 후반작업 중 실신을 한다. 이때에는 응급조치가 빨라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소룡은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며 건강검진을 받으러 미국으로 갔으나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이상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1973년 7월 20일에 베티 팅페이라는 여배우의 집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그것이 그의 삶이다.

그는 그만의 개성으로 끝없는 노력으로 짧은 삶을 살았지만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한다. 단 5편의 영화를 통해 동양인으로서 세계에 그 우월함을 보여주었고 그만의 문화현상을 남겼다. 그와 관련된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도 『이소룡 평전』, 『이소룡을 기억하다』 등의 책이 필자에 의해 출간되었다.

오늘까지 그의 이름을 걸고 테마파크가 중국에 만들어졌고, 수많은 아류영화와 다큐, 애니메이션, 광고가 제작되었다.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문화현상은 수많은 상품으로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다.

불세출의 스타이며 전설이 되어버린 그는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우리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아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그는 우리들의 히어로로서 영원할 것이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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