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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270일간의 기록- 오키나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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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270일간의 기록- 오키나와 촬영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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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담아내고자 하면 앵글은 나온다.
▲ 영상을 담아내고자 하면 앵글은 나온다.

5월 2일(일) 일본 출장일이다. 첫 장소는 오키나와로 저녁 8시 출발해 1시간 50분 걸려 후덥지근한 날씨의 나하공항에 도착했다. 5월 3일(월) 나하 항구는 지금은 수출입 선적이 이뤄지는 곳으로 한인이 부두노역을 했었던 곳이다.

오키나와는 인구 136만 명, 차량 등록대수는 80만대이다. 제일 큰 도시 나하 시에는 35만 명이 살고 있다. 오키나와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바람이 선선한데 본토에서 연간 6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휴양도시이다.

한국인은 태평양전쟁 당시 3천8백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령탑엔 만 명이 징용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렇듯 아직 한인 피해자 및 귀환자 연구가 아직 안되어 있어 제각각이다. 1945년 6월 오키나와 전투는 치열했고 슈리성 근처 사령부 자리는 초토화되었다. 오키나와는 결국 미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난민수용소는 16군데 있었다.

해변의 야카 수용소는 제3국인들의 수용소였는데 한국에서는 연구된 바 없다. 8월 이후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이동되었고 민간인은 CIS, 포로는 POW로 표시되어 구분되었다. 킨초군 야카면 야카비치우 야카 수용소는 태평양을 바라보고 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저 먼 바다를 보며 대륙침략의 야망을 꿈꾸었던 일본인들의 좌절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웅지를 드높였던 그들이 패전의 좌절 속에 가졌을 망국민으로서의 심정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이 이후에 가졌을 허망함이란 컸을 것이다. 그런데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되어 사지를 헤매다 이곳에 포로가 되어 온 한국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일본인들은 그것을 알기나 할까? 안다면 오늘날까지 여러 문제들이 왜 해결되지 않고 있는가? 일본의 극단적 우익 정치인들, 정말 각성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이번 주가 골든 위크라 차량이 적다.(4월 27일~5월 5일이 골든 위크 연휴이다) 관공서 찍을 일이 없다면 바쁜 일정을 소화할 수 있어 오히려 좋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의 한국인 위령탑 묘비문을 촬영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의 청년들이 일본의 강제 징용으로 대륙과 남양의 여러 전선에 배치될 적에 이곳에 징용된 사람 1만 여 명이 무수한 고초를 겪었던 것만이 아니라 혹은 전사도 하고 혹은 학살을 당하여 아깝게도 희생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들 원혼은 드높은 이곳 하늘을 멀리 떠돌며 비되어 흩뿌리고 바람되어 불 것이다. 우리는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고자 여기 온 민족의 이름으로 탑을 세우고 정성을 모아 영령들에게 삼가 원하오니 부디 명복을 받으시고 편안히 쉬소서.(1975년 8월 한국인위령탑건립위원회)”

오키나와 평화기념관은 본토인이 아닌 류큐인으로서의 피해상황과 수난사를 부각시키며 전쟁 피해자로서의 입장만을 부각시킨 전시였다. 촬영자료 요청에 담당자는 무슨 핑계를 대고 거절할까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참고로 오키나와는 원래 일본이 아니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제국 시절에 합병되며 오늘에 이른다. 그것은 홋카이도(북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2000년에 유네스크 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수리성은 류큐왕조가 19세기까지 사용했던 성이다. 그 성 아래 참호를 파고 결전을 준비한 일본제국 군사령부의 노력이 가상하다. 그 참호는 소중한 문화유산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5월 4일(화) 구해군사령부 참호. 관리주임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자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글썽인다.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없어야 한다고... 나로선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당혹스러운 눈물이다. 월요일 휴관으로 어제 못 찍은 이토스 아브지라 가마(대피동굴)를 다시 찾아갔다.

옛 위안소를 안다고 안내를 했던 도야마 사도시 씨가 당시 증언자를 두 분 모셔왔다. 당시 가게 점원을 했던 노인은 15명의 조선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도 일제를 규탄하고 있었다. 조선인 위안부의 불행한 역사를 알려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그의 말은 귀중한 증언이다. 미군상륙지인 감파곶을 찍고 공항으로 이동, 1시간 40분 비행 후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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