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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글벗- 전진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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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글벗- 전진환 작가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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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게스트로 했던 100회 세미나 때, 나에 잘 알기에 그가 사회를 보며 진행했다.
▲ 나를 게스트로 했던 100회 세미나 때, 나에 잘 알기에 그가 사회를 보며 진행했다.

전진환 작가는 <역사 속으로의 여행> 때 처음 만났다. 대학동문인 남돈우 후배가 방송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졸업생을 내게 보냈는데 그였다. 이력서를 보니 한마디로 화려했다. 군산 출신으로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이 있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동원수산의 큰 원양어선을 타고 북태평양에 가서 명태를 잡았다.

해외 원양에서 돌아와서는 서울예전의 광고창작과를 들어가 마케팅과 카피라이터 공부를 하더니 결국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방송작가 아카데미에 들어가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에는 그저 순진무구한 문학청년의 모습이었는데 그의 내면에는 외유내강의 굳은 심지가 숨어있었다.

그와의 첫 프로그램은 <자연의 가인 고산 윤선도> 편이었다. 그의 전공과도 관련이 있는지라 박식하게 글을 써냈다. 그러나 박식한 것뿐만이 아니라 성실 그 자체였다. 이미 서울예전 재학 시에도 ‘예술의 빛- 성실상’을 받은 그이다. 그는 나를 퇴근 시켜놓고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를 계속했다.

그의 집은 남산 중턱에 있었지만 EBS 기획제작부 사무실을 제 방 삼아 긴 밤을 지새웠다. 지금 생각하니 추운 겨울 얼마나 떨었을까도 싶다. 아침에 출근하면 전날 그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내게 촬영일정표를 건네주고는 근처의 사우나로 가서 씻고 한숨 자고 온다며 나간다. 그런 그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

<한국영화의 개척자 춘사 나운규>를 기획했을 때 나보다 더 춘사 나운규에 빠져 도서실에서 자료찾기에 몰입했다. 그 결과물이 55분짜리 나운규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어쩌랴? 편성시간은 40분이다. 넘치는 15분을 어쩌지 못하고 편성관리팀장을 찾아갔다. 이야기를 들은 팀장은 그러면 10분만 쳐내라는 것이다. 5분 정도까지는 재량으로 봐줄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와 그 이야기를 전하자 전 작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 줄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한 편을 다시 만들자고 그를 설득했고 기획안을 써서 다음 해에 만든 것이 <일제강점기의 영화>이다. 그만큼 찾아낸 초창기 영화자료가 많았고 애착이 가는 소재였던 것이다.

1997년은 소띠 해였다. 그해에는 <TV인생노트>라는 주당 한 편 60분 프로그램을 맡았는데 특집을 계속 맡게 되었다. 광복절 특집 <일제강점기의 영화>, 추석특집 <우리고향의 명주> 등 이 모두가 전진환 작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장에 일감이 몰려들어 신났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후 휴먼 다큐멘터리 <다큐 이사람> 시리즈의 <새가 살아 내가 살고 김성만> 편과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 고향 뒷집 후배의 이야기인 <소설을 쓰게 하는 힘 조헌용> 편을 쓰고 더 큰 물을 찾아 내 곁을 떠났다. 그가 그렇게 원하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였다. 홍수환 챔피언의 어머니가 남긴 명언이 있다. “나는 가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말리지 않는다.” 가수 옥희 씨를 두고 한 말인데 당시 대단히 회자되던 말이다.

말 할 수 없이 서운했지만 나는 그렇게 그를 떠나보냈다. 그 후 작가 지망생은 많아 수많은 작가와 일을 했지만 자연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시 날 찾아왔다. 나는 그의 재능을 알기에 차라리 조연출을 권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조연출이 된다. <건강클리닉>이란 프로그램 때이다. 당시 주당 5편이 나가던 30분짜리 건강 프로그램이었는데 정신건강 편에는 드라마타이즈로 콩트가 들어갔다. 어떻게 찍어오든 내가 편집해주마 하며 그를 혼자 현장에 내보냈다.

시간은 걸렸지만 그는 잘 찍어 왔고 이후에도 혼자서 야외촬영을 나갔다. 그러나 그는 역시 자신의 길은 작가라며 다시 내 곁을 떠났다. 이번엔 너무도 괘씸했지만 어쩔 것인가. 애정이 깊었던 만큼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동생 같은 그가 맨발로 고생길을 걷겠다니 드는 안타까운 심정과 같았다.

그의 나이 벌써 삼십 중반의 일이다. 이젠 편히 살면서 장가도 갔으면 하는 생각이 저는 없으랴 싶었다. 그렇게 생고생을 하다가 그가 다시 들어간 곳이 MBC 라디오이다.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의 작가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그에 대한 애증이 엇갈린다. 우리 처는 옆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쓰냐고 하지만 그만큼 사랑을 나눴던 작가도 없었다.

그런 그가 나를 찾아왔다. 드디어 장가를 간단다. ‘사랑의 교회’에서 있은 그의 결혼식은 은반지만 주고받아 조촐했지만 그였기에 거룩했다. 그리고 MBC도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글을 써볼란다고 한다. 점점 배부른 소리만 하길래 정신 좀 차리라고 “뭐 먹고 살 건 데?”라고 물었더니 “하나님께서 다 먹고살게 해준다”라는 나로선 이해가 쉽지 않은 엉뚱한 답변이다. 역시 “전진환답다!!” 싶었다.

내 곁을 떠난 그를 2004년에 불러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3부작 중 2부를 맡겼다. 2006년에도 다시 한번 불렀는데 <신상옥 감독 추모 다큐> 때문이었다. 우리는 90분 다큐를 짧은 시간 내에 존경심으로 밤새워 즐거이 만들어 냈다. 2010년에도 <G20 교육현장을 가다>도 그가 참여했으니 그는 야구로 치면 구원투수로 나의 구원작가이다.

그는 이후 CBS TV에서 일하였고 내가 방송 일을 그만 둔 지금은 대전에 살며 아직도 방송과 홍보영상 일을 하고 있다. 그와 함께 일하는 PD가 부럽다. “전 작가, 내가 그대를 만난 건 전생의 덕이라고 생각하오.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당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부디 먼 곳에 떨어져 있지만 문운장구(文運長久)를 비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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