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열 연출가는 1941년 8월 8일생으로 경기도 개풍군 대성면 풍덕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공무원이었던 이유로 여러 곳을 이사 다녔는데 1960년에 군산고를 졸업하고 중앙대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전쟁을 포함하여 유년의 경험은 추후 작가로서의 정서적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이근삼 교수는 대학 때 그의 스승으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습작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1966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극단 가교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상임 연출과 대표를 역임하였다. 1978년에는 현대극장으로 옮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이진순 연출의 조연출을 거쳤다. 그는 <실수연발>을 번안‧연출하였고 <종이연>, <멀고 긴 터널>, <길>, <프란다스의 개>를 연출하였다.
1981년 최치림, 조병진 연출가와 함께 국비로 미국 연수를 가 브로드웨이 라마마 극단에서 1년간 현장 연수를 받았다. 그는 귀국하여 현대극장에서 <에비타>, <피터팬>, <올리버>, <사운드 오브 뮤직>,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의 대작 뮤지컬을 연출한다. 그는 이 분야에 다재다능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무렵 고석만 PD가 연출한 MBC <수사반장>의 극본을 3년간 100여 편 집필한다. 1980년에 방송된 MBC 6.25특집드라마 <아베의 가족>도 그의 극본이다. 1984년에는 우리극단 마당세실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이전에 공연한 <길>, <종이연> 등이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인연으로 초빙된 것이다.
그는 마당세실극장에 전속되어 직접 대본을 쓰는 작‧연출을 하였는데 정통 연극만을 공연하였다. <배비장전>, <열쇠와 자물쇠>, <길>, <님의 침묵>, <풀리지 않는 매듭>, <달빛 처녀>, <언챙이 곡마단>, 외에 신형원 가수가 출연한 <풀리지 않는 매듭> 등이 이때 공연되었다.
88서울올림픽 때에는 개폐회식 구성 대본과 총연출을 맡았고 96부산동아시안게임 개‧폐회식에서도 구성 대본과 연출을 맡았는데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대표 연출가였던 셈이다. 그는 1988년 가을 ‘극단 신시’를 창단해 <애니깽>, <등신과 머저리>를 공연한다. <등신과 머저리>는 공연장인 대학로 소극장 150석이 꽉 차 360명까지 입장하는 대박이었다. 당시 수입이 2천만 원이었다고 하니 대단한 기록이다.
이후 마당극으로 <옹고집전>, <황진이>, <구운몽>, <배비장전>을 공연하고 MBC 드라마 <풀잎마다 이슬> 극본을 집필한다. 그는 상복도 따랐는데 이즈음 무대에 올린 <우리는 나발을 불었다>는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작품상‧연출상을 수상했다.
이후 <싯달타>, <열쇠와 자물쇠>, <오로라를 위하여>, <바람 분다 문 열어라>를 공연하고 악극을 시도한다. 그는 <번지 없는 주막>, <홍도야 우지마라>, <울고 넘는 박달재>, <눈물 젖은 두만강> <굳세어라 금순아> 등으로 우리가요 뮤지컬인 악극의 붐을 일으켰다.
1990년에는 서울 양재동의 구룡사 주지스님과의 인연으로 사찰 내에 소극장 및 연습장을 마련하고 다시 뮤지컬을 시도해 <님의 침묵>, <무애가>, <라이프> 등으로 뮤지컬의 붐을 일으킨다. 그러던 그가 1998년 10월 26일 췌장암으로 타계하니 57세로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무렵이다.

나와는 인연이라면 EBS PD시절 그를 만나 인생의 금언을 들었다. 1995년 즈음 명사들의 인터뷰 프로그램인 <명사칼럼>의 출연 약속을 했다. 하지만 연극연습에 몰두하여 출연약속을 펑크 내기도 했는데 그의 진면목이다. 연습에 몰두해 방송출연을 펑크 낼 정도이니 자기 일에 대한 대단한 몰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 역시 PD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그는 1985년 현대극장 단원이었던 한보경 배우와 결혼하였고 딸인 김태나 양을 두었다. 한보경 씨는 고인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담은 수기 <영원한 내 사랑 잠깐 안녕!>을 출간했고 『김상열 희곡집』은 거의 매년 출판되어 현재 17권이 이르는데 2020년에 『수사반장』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김상열 연출가는 판타지와 현실감이 조화된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는데 연기의 기교보다는 진실한 감성에 호소하는 표현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또 ‘중간톤’이라는 표현을 즐겨했다는데 애매하지만 그만큼 배우들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 준 게 아닌가 싶다. 은유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말로 배우들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는 연기지도를 했다고 한다.
그의 애제자인 여운국 배우는 “그 분은 정신적 의식세계를 중요시하고 비리와 타협하지 않는 반듯한 분”으로 회고했는데 엄했던 만큼이나 그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존경스러웠던 분이었고 한다. 그의 조연출을 했던 장승세 연출가는 “개인적으로 위인 같은 분이었다”고 그의 카리스마를 회고하며 “10년 후에는 관객들이 공연장에 넥타이를 매고 오게 하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작고 후 극단 '신시'는 당시 기획실장을 지냈던 박명성 씨가 운영하며 ‘신시뮤지컬컴퍼니’로 현재 잘 나가는 뮤지컬 극단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김상열 사랑회’에서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매년 추모일에 맞춰 유작을 공연하고 있다. 아울러 유족인 한보경 씨가 대표로 있는 '김상열 연극사랑' 극단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를 기리는 ‘김상열 연극상’도 제정되어 2022년 현재 24회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장학금 수여식까지 겸한다. 이 상의 특징은 김상열 연출가처럼 작‧연출을 하는 연극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제1회에 조광화를 시작으로 많은 연극인들이 수상했다. 그는 2020년 10월 문화예술발전유공자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