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19 13:59 (금)
[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회장
상태바
[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회장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2.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2014년 전후 고 신일룡 회장(왼쪽)과 필자
▲ 2014년 전후 고 신일룡 회장(왼쪽)과 필자

우리 세대 중에서 액션배우 신일룡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이다. 그가 배우라는 직업을 은퇴한 지가 벌써 37년이니 그를 모르는 신세대도 많을 것이다. 그는 1947년 10월 17일(금/양력) 함흥 출생으로 1969년 신상옥 감독의 <이조괴담>으로 데뷔하여 한 시대를 풍미한 미남 스타이다. 그는 이소룡의 후계자로 한국을 비롯하여 홍콩과 동남아를 오가며 많은 액션영화에 출연했다. 무엇보다도 쾌남 CF하면 그를 떠올리게 되고 팬들은 그를 쾌남아로 기억한다.

나는 그를 형이라 부른다. 조감독 시절 톱스타인 그를 만난 건 사십여 년 전이다. 형은 고려대에 재학 중이던 이십대 초반에 영화계 데뷔와 동시에 스타로 등극한다. 그리고 해태제과 전속모델로 브라보 콘 등의 CF에 출연하였는데 경영학도답게 계약금 대신에 해태제과 대리점을 받았다. 이재에 밝은 것인데 누구도 하지 않은 행보였다.

그는 동아수출공사가 1986년에 제작한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를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떠났다. 그의 꿈은 비즈니스였다. 사업가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상의 자리를 미련 없이 떠난 것이다. 성격이 급하기도 하지만 그의 판단력과 추진력, 결단력은 타고난 것이다. 남산에 양식 레스토랑을 경영하였고, 패밀리 레스토랑의 원조인 ‘런던팝’을 운영하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쉼 없는 사업 확장과 그 인생의 정점에서 운명처럼 부도가 나며 인생의 바닥을 쳤다.

그가 벌인 사업은 모두가 성공하였는데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 절정에서 실패가 찾아온 곳이다. 그가 제주도에 카지노 호텔을 건축하며 자금 조달의 나락으로 떨어져 그의 표현에 따르면 바닥을 쳤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선 형이다. 그는 재기를 위해 호구파이 사업을 시작한다. 바닥에서 일어서기 위한 사업이지만 호두파이 반죽을 하며 가슴속의 한을 삭였을 것이다. 그는 호두파이 사업으로 재기하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였다.

그의 호두파이 사업은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확장되었고 전국에 매장이 세워졌다. 신일룡의 호두파이 회장으로 매장 확장에 열중이었다. 내가 새 차를 딸에게서 선물 받았던 2020년, 속초에 오픈한 호두파이 매장을 팬들과 함께 다녀왔다. 앞치마를 두르고 직접 호두파이를 굽는 그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타관 객지에서 홀로 산다는 것은 느슨한 힘 빼기 같은 일이다. 그것도 인생의 정점을 찍고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은 이에게는 필요 없는 일일 수도 있다.

2021년 겨울 속초의 호두파이 매장에서
▲ 2021년 겨울 속초의 호두파이 매장에서

타인들이 섣불리 흉내 내었다가는 쓰러지기 십상인데 그건 용기 없는 자들의 변명일 뿐이다. 나도 당뇨가 와서 운동하면서 술 조심하며 살고 있지만 형 역시 당뇨병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런 줄을 몰랐는데 천하의 신일룡 회장도 병마와 싸우며 고군분투한다는 것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아직도 더 고생을 해내도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으리란 것이다. 

나 역시 객지생활을 해보아서 그 고생을 알고 있다. 그러한 힘듦에도 그것을 실천하는 이가 바로 신일룡 회장이었다. 형의 지론은 “(나이 들었다고)앉아서 쉴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허투루 시간 보내는 것이 인생이 아니기에, 아직도 부지런히 살아야 할 나이이기에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당대의 스타로서, 또 청계산에 버젓한 본사를 두고 있는 형이 속초에까지 가서 왜 고생을 사서 하는지는 알다가 모를 일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당시 간암 투병 중이었다. 당시로서는 너무 건강하여 모두가 잘 몰랐다. 자신에 대한 끝없는 혹사라고 느껴지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의 타고난 성격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2021년 폭설이 내리던 날이다. 신 회장은 알밤을 이용한 호두파이 개발을 위해 밤낮없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개발은 미수에 그쳤다. 그것은 알밤이 워낙 빨리 굳어버리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는 신 회장의 노력이 대단할 뿐이였다. 그것은 청년정신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가 간암 말기였다는 것을 알면 더욱 놀랄 일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Even if I knew that tomorrow the world would go to pieces, I would still plant an apple tree.)“는 마틴 루터의 말이 생각난다.

“형! 세상사는 게 왜 이리 힘들어?” 하면 형은 “인생은 다 그런 거야.”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그만큼 열심 살았던 분을 만난 적이 없다. 심지어 2022년 5월, 별세 2주 전까지도 새로운 매장을 찾아 함께 다녔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 형이다. 그의 인생철학을 안다면 어찌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곧 출간될 『신일룡 평전』에서 그의 삶을 나는 “왕의 소풍길”이라고 썼다. 쓰라린 좌절에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해 재기를 하였고 힘들었지만 세상을 관조했던 그이다. 그가 남긴 많은 영화와 사진들, 그리고 남겨진 이들... 분당의 메모리얼 파크에 먼저 잠든 그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새겨보는 그의 인생이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