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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교수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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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교수님, 존경합니다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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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왼쪽)는 대학원 박사모임에서 임대근 교수님(오른쪽)에게 졸저를 증정했다.
▲ 필자(왼쪽)는 대학원 박사모임에서 임대근 교수님(오른쪽)에게 졸저를 증정했다.

인생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다. 누구나 스승을 만날 수는 있지만 모시기는 자신의 결정력이 크다. 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20여 년 만에 대학원 진학을 했었다. 무슨 영광을 생각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학문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직장생활이 시간적으로 여유 있을 리 만무한데 더 이상 미루다가는 평생 두고 후회할 것 같아 정한 일이다. 늦깎이 학생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전공은 방송사에 근무하던 때이므로 주저 없이 방송학으로 정하고 퇴근 후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정책과학대학원(현 정치행정언론대학원)의 신문방송학과로 정했다.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니므로 결석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직장에서 학교까지는 먼 거리이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다시 시작하는 학창시절과 공부는 힘들었지만 더없이 즐거웠다.

수업을 빠지지 않고 듣다보니 어느덧 논문을 써야 하는 시기가 왔다. 나는 입학할 때부터 쓰고자 했던 논문이 있었으니 다른 학생들에 비하면 한결 수월하기는 했지만 처음 써보는 학위논문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주변의 전공 선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목차를 잡았다. 그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고 지도교수님의 지도로 논문은 틀을 잡아갔다.

내가 쓰고자 하는 논문은 일제강점기 상해에서 활동한 한국영화인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이미 EBS에서 1997년 광복절 특집으로 제작한 <일제강점기의 영화>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소개한 바 있었다. 그들이 중국으로까지 가서 만든 영화는 바로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였다. 1928년 제작인데 <애국혼>이라는 영화이다. 안중근 소재로는 국내외를 통틀어 첫 영화였다.

그동안은 중국과 수교가 안 되고 그 시기에 활동했던 영화인들조차 모두 별세해 그 사실들이 밝혀지지 않았었다. 나 역시 제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고 중국 취재를 하며 당시 신문기사며 스틸, 그리고 <잘 있거라 상해>라는 영화까지 한 편 발굴해내니 의미 있는 제작이었다. 그러니 일종의 특종을 한 셈이었다.

나는 제작을 마치고 방송으로 한 번 나가고 끝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변의 아는 교수님들에게 자료를 건네며 논문으로 쓸 것을 권유하였지만 모두가 시간만 보내며 쓰질 않았다. 이럴 바에야 내가 직접 학위논문으로 써야겠다고 작정하고 대학원 진학을 하였고 논문의 구색을 갖추어 나갔다.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나는 다시 중국의 상해, 북경까지 원정하며 취재를 하여 드디어 「일제강점기 상해파 한국영화인 연구」 논문을 완성했다.

당시 최영 교수님이 논문지도에 애써주셨고 논문의 학술적 의미와 반향은 컸다. 신문기사로 보도될 정도였고 훗날 한국영화사의 공백을 메꾼 발굴 논문이기에 주변의 격려도 많았다. 졸업식 때에는 정책과학대학원 최우수논문상을 받았다. 단순히 방송 다큐멘터리로 끝날 일이 아니기에 자발적으로 나선 보람이 있었다.

내친 김에 박사논문을 써야겠다며 기회를 벼르던 차에 새롭게 자리매김한 신학문인 문화콘텐츠학과에 진학했다. 학위논문으로 그동안 내가 취재해왔던 한국합작영화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되었다. 임대근 지도교수님을 만나 목차를 잡고 수업과 논문을 병행해서 쓰다시피 했는데 역시 박사논문은 달랐다. 모아놓은 자료를 찾다가 시간만 보내는 형국인데 그만큼 많은 자료를 찾았고 결국 그 자료들은 논문을 쓰고 난 몇 년 후에 『한국합작영화 100년사』라는 두꺼운 책 한 권으로 발간했다.

한국의 합작영화 역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다. 일제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선동영화 제작을 하며 한국인 배우나 조감독을 기용했고 그 영화들을 그들은 합작영화라고 했다. 그들이 제작한 목적영화이지만 그렇게 위장합작영화로 만들어 한국인들을 우롱했다. 그렇게 제작된 영화가 내선일체를 주장한 <그대와 나>, 전쟁터로 함께 나가 싸우자는 <지원병>, 그 외에 <군용열차>, <망루의 결사대> 등 다양하다.

광복 후에는 인기를 끌었던 홍콩영화에 편승해 오리지널 영화를 수입해 장면을 부분 교체하는 위장합작영화가 제작된다. 이 모두 영악한 제작자들의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이는 봉인된 공공연한 사실들로 당사자들로선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던 극비사항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당대의 해당 영화인들을 공개석상으로 모셔 세미나를 개최해 사실을 밝히고 진위여부를 가렸다. 공개석상에서 말들은 모두 녹화되었고 논문의 주요 자료로 활용됐다.

논문심사장에서 심사위원들 사이에 논란이 컸었다. 일제강점기의 합작영화에 대한 서로의 견해차가 컸기 때문인데 당시 학술적 정리가 끝나지 않은 논제였기 때문이다. 첫 연구는 이래서 힘든데 논문은 수정을 거듭하며 결국 통과됐다. 「한국합작영화 연구- 위장합작영화를 중심으로」의 논문심사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 속에서도 임 교수님의 응원이 내게 큰 힘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나는 내 인생에서 석사, 박사를 꿈꾸지 않았는데 나의 길을 걷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EBS 퇴임 후 호남대 교수 모집에 응모하니 총장 면접까지 올라가 무난히 전임교수가 되었다. 이 모두 나를 이끌어 주신 교수님들의 덕이 아니겠는가? 내게는 모두가 선물 같은 일이었다. 교수님을 만나고 그로 인해 펼쳐지는 인생살이는 인과응보로 정해진 각본 같은 일인데 어떻게 내게 이런 축복이 내렸을까 절로 감사의 인사가 나온다.

임 교수님은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의 초대 부회장을 맡아주었고 졸업 후에도 여러 학회 활동을 통해 만났다. 그리고 내가 한국다큐멘터리학회장이 되고 나서도 자문위원으로 적극 밀어주고 있다. 세상에 이런 인연은 다시없을 것이다. “교수님, 존경합니다!!” (이 글은 한국외대 동문회보에 실린 동문 칼럼을 축약한 내용이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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