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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정창화 감독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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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정창화 감독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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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겨울, 정창화 감독의 귀국 축하 자리에 함께 한 윤일봉 배우(왼쪽)와 정창화 감독
▲ 2010년 겨울, 정창화 감독의 귀국 축하 자리에 함께 한 윤일봉 배우(왼쪽)와 정창화 감독

1928년생인 정창화 감독은 한국과 홍콩에서 활동했던 감독이다. 앞서 소개한 런런쇼나 레이몬드 초우를 모두 겪은 감독이다. 내가 홍콩의 그에게 팬레터를 보낸 것이 고등학생 시절인 1971년이다. 당시 한국의 극장가에서는 리바이벌 붐으로 유명한 영화들이 재상영중이었고 나는 그 이야기를 서두로 감독님의 영화에 반했으니 나를 홍콩으로 데려가 달라는 이야기를 슬쩍 내비쳤다.

정 감독으로서야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편지였을 것이고 당연히 답장은 없었다. 그 편지가 정 감독에게 전달이 안 될 수도 있었는데 정 감독으로부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71년이라면 정 감독이 쇼브라더스를 나와 골든하베스트에 합류했을 즈음이다. 여하튼 나로선 쇼브라더스로 편지를 부칠 수밖에 없었다.

정창화 감독은 일제강점기 말 한국영화의 개척자이었던 <자유만세>의 최인규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신상옥, 홍성기 감독과 같은 문하생이다. 수많은 조감독들이 그를 거쳤는데 임권택 감독이 그의 조감독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정 감독의 문하생 계보 언저리에 있는 셈이다.

최인규 감독의 광적인 호기심은 신상옥 감독을 통해서 들었는데 존 웨인 주연의 <역마차>를 빌려다 같이 보며 액션 프레임을 연구했다는데 그런 영향을 세 사람 모두 받지 않았나 싶다. 1960년대에 <춘향전>을 놓고 한바탕 힘겨루기를 했던 홍성기 감독과 신상옥 감독은 라이벌 의식을 가졌기에 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신상옥 감독은 홍성기 감독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정창화 감독에 대해선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고 배우지망생이었다고 회고했다.

어쨌든 그들은 명감독이었던 최인규 밑에서 영화의 기본부터 배운 동문들이다. 신상옥 감독이 여러 쟝르를 넘나든 대가라면 홍성기 감독은 대표적인 멜러영화의 대가이다. 그리고 정창화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 흔치 않았던 액션 장르를 개척하고 발전시킨 감독이다. 일본 쟌바라영화와 홍콩무협영화의 영향이기도 했겠지만 그가 1960년대 한국 무협영화를 가장 그럴듯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에는 외국의 영화를 직접 볼 기회는 적었고 아무래도 시나리오나 스틸 책 정도를 보고 받은 영향 정도이다. 당시의 제작 풍토로 보면 일반적인 현상으로 그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는 데뷔작인 <최후의 유혹> 이후로 30여 편의 액션영화를 만들었고 그가 보여준 활극의 재능은 탁월했다. 자로 잰 듯한 섬세한 연출로 액션은 과장을 벗어났고 실감이 있었다.

그는 한국 최초로 해외로 수출된 감독이기도 하다. 1958년 <망향>을 필두로 꾸준히 홍콩과의 합작영화를 만들던 그는, 홍콩의 런런쇼의 제안으로 쇼브라더스에 영입된다. 그것은 다분히 그의 의도였는데 수시로 합작을 통해 홍콩을 들락거리며 런런쇼의 시선을 끈 결과였다. 그로선 더 큰 규모의 영화판에서 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스튜디오 메이킹 보다는 로케이션의 대가로 그런 점이 런런쇼에게 새롭게 보였다고 한다. 그러한 장기를 살린 정 감독의 쇼브라더스 1호 작품인 <천면마녀>는 홍콩에서 흥행에 성공하고 유럽에 수출된 최초의 홍콩영화이다. 여자 007식의 이 영화는 한국에도 소개되어 탈 아시아적인 영화미를 선보였다. 정 감독은 정통무협영화 <아랑곡의 혈투>를 만들었는데 런런쇼는 자사의 감독들에게 이 영화를 의무적으로 시사케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그의 신무협(?)은 런런쇼의 눈길을 끌만했다.

그는 사실 좋은 여건에서 영화를 만들지는 못했다. 텃세로 인해 배우, 촬영기사, 하다못해 무술감독까지 시간이 나는 사람들과 작업했을 터인데 스튜디오 환경이며, 중국무술이며, 풍습이며, 의상 모두 생소한 환경에서 이런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정 감독의 센스와 노력의 결과물일 것이다. 이런 결과로 “그는 호화 요트며 집을 제공받아 폼 나게 살았다”고 김수용 감독은 전한다.

그를 본격적으로 미국시장에 알린 영화는 권격액션영화인 <철인(천하제일권/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다.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장철 감독 사단에서 밀려나 시간이 남는 배우인 라열과 만드는데 의외로 이 영화가 미국시장에 개봉되어서 대단한 선풍을 일으킨다. 정 감독으로서는 세계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는 스카라 극장에서 <철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는데 정교한 액션연출이 돋보이는 영화로 긴장감 속에 보여주는 대결이 압권이다. 당시 이소룡의 열풍 속에서 보여준 또 다른 액션인데 이 영화를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액션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영화”라고 극찬을 한다.

1971년에 정창화 감독은 쇼브라더스의 새로운 운영자인 모나퐁과 의상문제 등 제작과정에서 마찰이 생긴다. 이런 불화 속에 먼저 쇼브라더스를 나온 기획자 레이몬드 초우의 권유로 신생영화사인 골든하베스트사에 합류해 한국로케로 <흑야괴객>을 연출한다. 영화는 투자자를 찾아 한국까지 와서 우진필름과 공동제작했다.

그는 골든하베스트에서 일하며 이소룡과 같은 회사에 있게 된다. 다음 화는 이소룡과의 일화이다.

2007년 3월 16일 샌디에이고의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 2007년 3월 16일 샌디에이고의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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