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5 23:56 (목)
[안태근의 다큐세상] 신봉승 작가
상태바
[안태근의 다큐세상] 신봉승 작가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봉승 작가는 녹색 잉크의 몽블랑 만년필로 시나리오에 자세히 가르침을 써주셨다.
▲ 신봉승 작가는 녹색 잉크의 몽블랑 만년필로 시나리오에 자세히 가르침을 써주셨다.

신봉승 작가는 1933년생으로 정통 역사극을 정립한 분으로 2016년 4월 19일 향년 84세로 별세하였다. 작가는 말로 못할 고통을 내적으로 겪는 직업이다. 직업으로 글을 쓴다면 그러한 고통을 감수하여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그야말로 근성이 요구되는 직업인 것이다. 프로라 함은 그만한 사례의 대가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이름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며 하늘의 큰 별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그러한 가르침을 주신 분이 바로 신봉승 작가이다. 강릉 출생인 신 작가는 처음 시인으로 등단하여 국방부 시나리오 공모에 <두고온 산하>가 당선되며 영화와 인연을 맺는다. 당시 지인들에게 양복을 한 벌씩 맞춰주었다고 하니 고료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영화평론가 김종원 선생님도 한 벌 얻어 입었다고 지금도 자랑이다.

정작 본인은 가난한 문학도로 자기 집 한 칸 없었던 때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한국영화사에 우뚝 섰다. 1960년대 최고의 영화들이 그의 시나리오였다. 작품성과 흥행성 두 가지가 모두 보장되는 그의 시나리오는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 자체가 시나리오의 교과서인 셈이었다.

TV로 자리를 옮긴 신봉승 작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작가대우를 받았다. 선생이 쓴 <TV드라마 시나리오 작법>은 작가지망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김수현 작가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도 이 책을 보고 다시 공부해야겠다”라고 했을 정도이다. 선생이 쓰신 또 하나의 명저는 <영상적 사고>이다. 각 학교에서 영화과 강의를 하시며 당시 최고의 영화 이론서를 쓰신 것이다.

그의 시나리오는 장르를 망라했다. 데뷔 초창기 <말띠여대생>(1963), <청춘교실>(1963), <월급봉투>(1964) 등의 사회풍자극부터 <갯마을>(1965),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산불>(1967), <봄봄>(1969), <독짓는 늙은이>(1969), <홍살문>(1972), <연화>(1973), <을화> (1979) 등 문예영화와 <돌아온 왼손잡이>(1968), <인간 사표를 써라>(1971) 등의 액션영화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대극이 선생의 전문분야가 되었다. 처음 TBC 시절 첫 사극을 쓰며 시작된 사극장르에 깊이 매료되며 주로 쓰시게 된 것이다. 선생은 신상옥 감독이 한 말 “무릇 남자로 태어나서 영화감독 한 편은 해봐야지”라는 말에 고무되어 송병수 원작을 각색하여 남성우, 윤정희, 남궁원을 주연으로 <해변의 정사>(1970)를 연출한다.

서른여덟에 늦깎이 감독데뷔를 하나 영화연출은 그 한 편 뿐이다. 밀려드는 원고의뢰 때문이 아니었을까? TV에서 선생의 활약은 독보적이다. TBC 시절 <별당아씨>를 비롯하여 MBC에서 장기방영된 <조선왕조 오백년사> KBS의 대하사극 등이다. 그야말로 신봉승 작가 모셔오기에 방송 3사가 골몰하던 때이다.

나와 선생과의 인연은 그 전으로 대학생 때였다. 습작으로 대학노트에 썼던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뵈었다. 그건 신 작가의 댁과 우리 집이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평소부터 신봉승 그 이름 석자를 가슴에 새겨두었기 때문이다. 선생을 찾아가기까지 내 나름대로 습작 시나리오를 다듬고 또 다듬었음은 두 말할 나위없다.

선생은 양팔 간격 량의 습작을 해야 책이 팔릴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즐겨 쓰는 몽블랑 만년필로 시나리오에 자세히 가르침을 써주셨다. 선생님의 잉크는 항상 녹색이었다. 말년에야 컴퓨터로 원고 작업을 하였지만 그 때는 직접 그 만년필로 써야 글이 나온다고 하던 시절이다.

항상 강연 등으로 바빴던 선생님의 활동을 들었고 동네 목욕탕에 가면 자주 선생과 만나기도 했다. 어떤 날 골목길에서 뵌 선생님은 걸으면서도 씬 정리표를 들고 구상 중이었다. “아! 프로란 저렇구나!” 하는 인상이 지금도 내게 각인되어 남아있다. 선생의 문하에 박찬성 작가가 있고 고원정 소설가도 선생의 문하생이었다.

나에게도 주신 가르침이 있었기에 나는 그나마 졸고를 쓸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나의 영원한 글 스승이다. 나는 연출하던 <TV인생노트>에 “한국드라마를 이끈 극작가 신봉승” 편을 제작했다. 1997년 7월에 방송되었고 황인용 씨 진행이었다. 신 작가는 내가 존경하는 분이기에 특별히 부탁을 드려 스튜디오에 모셨다.

걸어 다니는 역사책이라는 평에는 역사책을 보기는 봤는데 과찬이라고 웃어넘겼다. 우리 민족은 고려왕조가 475년, 조선왕조가 519년간 존립하며 기록을 남긴 민족이라고 한다. 그는 역사소설가도 못 읽은 조선왕조실록을 처음 복사해 읽으며 정통 역사드라마를 썼다. 그는 드라마 한 편을 쓰기 위해 한학자를 찾아가 녹음을 해가며 썼다고 한다.

드라마 작가는 사관이 쓴 역사를 다시 풀어쓰는 이라고 한다. 이 작업을 위해 한국역사문화연구소를 51세에 개소했다. 원래는 만년필을 사용했으나 이 방대한 작업을 위해 워드로 작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방송 후 조상을 욕되게 했다며 숭조사상으로 찾아오는 항의성 방문객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한 어려운 일도 있지만 반대로 고마움을 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라남도 장수가 고향인 논개의 성씨가 주 씨여서 주논개로 바로잡기도 했다.

대학원을 50세가 넘어서 입학했는데 학문적인 분위기에 젖어보자 함이 입학의 이유이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제자가 강의를 들어와 교수가 어려워했지만 리포트 제출 등 학생의 도리를 완벽히 했다고 한다. 졸업논문은 「학국역사소설 연구」로 이광수 소설이나 김동인, 박종화 등의 역사 소설의 역사적 오류를 밝혀냈다. 논문심사 때 심사교수들이 믿을 수 없다고 깜짝 놀란 논문이란다. 그는 64세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나의 글 스승인 당대 최고의 작가 신봉승
▲ 나의 글 스승인 당대 최고의 작가 신봉승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