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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이만희 감독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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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이만희 감독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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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천재로 불리운 이만희 감독
▲ 영화천재로 불리운 이만희 감독

이만희 감독을 만난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40주기 기념전을 통해 그의 영화를 모두 보았다. 그는 영화는 저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내게 공부시켜 주었다. 그는 내가 살았던 왕십리 사람이다. 연극 조연출을 했던 그 역시 광무극장을 통해 영화를 공부했을 듯하다. 그의 이야기는 워낙에 많은 분들로부터 전해 들어 흡사 겪어본 듯하다. 그의 나이는 우리 아버지 또래인 1931년생이다.

그의 영화 중 기억나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는 102분으로 신성일, 김정훈, 안인숙, 최남현, 이대엽, 우연정, 박근형, 오유경, 이경희 출연이다. 영화진흥공사가 당시 국책영화로 만든 영화 중 한 편이다. 당시 임권택 감독은 <증언>, 김시현 감독은 1975년 <잔류첩자>를 감독했다. 임권택 감독은 1976년에 또 한 편의 국책영화 <낙동강은 흐르는가>를 감독했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그중에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는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전후를 내용으로 기습남침에 밀린 국군의 악전고투를 소년의 시각에서 조명한 전쟁영화의 압권이다. 원작자인 선우휘는 전쟁문학의 백미인 <열세살 소년>, <싸릿골의 신화>, <단독강화>등을 썼는데 이 영화 역시 그의 원작이며 유동훈 작가가 각색을 맡았다.

6.25의 실상을 보여주는 한국전쟁영화사에서 으뜸으로 손꼽힐만한 명작으로 전방지역인 강원도 인제에서 17연대와 탱크부대의 대규모 물량지원과 인원동원으로 완성된 영화이다. 당시 군민들이 고생이 화면에 보이는 역작이다. 특히 소년 주인공을 맡았던 김정훈은 같은 해 6월에 개봉했던 신상옥 감독의 <13세 소년>이후 연기천재다운 열연을 보여주었다.

이만희 감독으로서는 한민족이라는 동포애와 라스트에 보여지는 인민군 병사와의 소년의 화해과정을 통해 순수한 휴머니즘을 그리고자 하였으나 검열에서 요주의 감독의 꼽히던 그이기에 쓸데없는 오해를 받았을 법하다. 당시 윤주영 문공부 장관이 욕심을 부려 재촬영을 요구하였으나 이만희 감독은 대본을 내던지고 나왔다고 한다. 괘씸죄로 몰린 이 감독은 빠지고 후속대책을 논의하여 신상옥 감독에게 맡기기로 하여 신감독이 시사를 하였으나 “고칠 데 없구만...” 하며 빠지고(사실이 그러니까) 편집을 맡은 영화진흥공사 김창순 편집실장이 알아서 편집하여 지금 버전으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만희 감독이 그리고자 했던 동족상잔의 아픔은 약화되고 빨갱이 나쁜 놈 식의 홍보영화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이 영화는 지금도 제작이 불가능할 정도의 지원을 받아 명품 전쟁영화로 남아있다. 남아있는 상영본은 리마스터링을 거친 최고의 화질로 반세기 전의 영화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나는 당연히 ‘한국영화100년사 세미나에서 그를 소개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2015년 4월부터 7월까지 넉 달 간 3회에 걸쳐 그의 세미나를 서울과 광주에서 개최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반했으면 그랬을까?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2015년 4월 26일 제23회 세미나, 한국영상자료원, 발제 안태근 “이만희 감독의 영화와 인생” 초청대담 이석기 촬영감독, 유지형 감독.

2015년 6월 28일 제25회 세미나, 한국영상자료원, 발제 유지형 “못다한 <만추> 이야기”

2015년 6월 30일 제26회 세미나, 광주영상복합문화관, 상영작 <이만희 다큐멘터리>, 안태근 “이만희 감독 40주기 특강 영화천재 이만희 감독”

 그는 영화천재로 불리고 있는데 영화감독 중의 최고 멋쟁이는 신상옥 감독임이 확실하고, 이 감독이 그에 못지않은 매력남으로 남자스러운 매력이 있었다고 한다. 훤출한 키에 촬영장에 아령을 들고 다니며 팔운동을 했던 것이야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남의 술 얻어먹기보다는 혼자 댓병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고 조감독과 같이 왕십리 추어탕집에서 행복을 찾았던 이다. 그와 술자리를 갖고 싶어 했던 영화인들이 많았으나 정작 그와 술자리를 하게 되면 호쾌하게 글라스에 댓병술을 따라 마셔대는 통에 두 잔 정도 마시고는 슬쩍 도망쳤다는 고백담도 있다. 그의 술자리는 주량에 비해 깔끔했다고 전해진다.

현장에서의 연출도 특이했는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스킨십을 하며 주문 외듯이 연출을 하였다고 한다. 여배우로서는 오금이 떨리는 상황일 수도 있는데 홀린 듯 연기세계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카메라 연출도 다음 장면의 카메라 위치를 정해 주며 카리스마 연출했다고 한다. 그것은 머리 속에 콘티가 확실해야 하고 편집과 영상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어느 감독인들 그렇지 않은 이가 없었겠지만 그는 특별했다. 일부러 쇼맨십으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영화감독으로서의 타고난 그만의 멋이다.

그는 커다란 키에 다소 춥게 옷을 입었는데 안종화 감독의 조감독 시절, 배우 문정숙씨는 "미스터리 이리 와봐."하며 그에게 마후라를 선물했었다고 한다. 두어살 연상인 문정숙 배우는 이 감독이 감독 데뷔를 하며 그의 페르소나가 되었다. 이 감독과 그녀와의 만남은 평탄치 않았었는데 영화계 선배 감독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 남녀는 10여 년 가까이 함께 영화작업을 했는데 그녀와 헤어진 이유는 신인여배우 M 때문이다.

당시는 주로 여관에서 시나리오나 콘티 작업을 했는데 이 감독의 작업하던 방에 M이 함께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M은 그의 영화로 데뷔한 신인인데 문정숙 배우의 눈에 띈 것이다. 문정숙 배우와 헤어진 이후 이 감독의 술자리는 점점 늘어났고 그의 몸은 점점 축이 갔다. 이 감독은 <삼포가는 길>을 편집하다가 병원에 실려 갔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촬영하며 추운 겨울날씨를 술로 견뎌냈던 그이다.

백일섭 배우는 그가 죽기 전날, 웬일로 주머니에서 안주를 꺼내 주더라고 기억한다. 더 이상 술을 먹으면 안 될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까?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명편을 만든 명감독, 그의 영화는 흑백영화가 더 그의 영화답다. 그는 흑과 백의 조화 속에 인간의 착하고 선한 심성과 어두운 심성을 그려냈던 영화천재이다.

2015년 4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그의 40주기 기념전 포스터
▲ 2015년 4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그의 40주기 기념전 포스터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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