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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정진우 감독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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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정진우 감독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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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서울시 문화상 시상식장에서 정진우 감독(왼쪽)
▲ 2020년 서울시 문화상 시상식장에서 정진우 감독(왼쪽)

신사동 그 사람, 바로 ‘(재)한국영화인복지재단’을 이끄는 정진우 감독이다. 상은 작품의 질과도 일치하고 상을 많이 받은 영화는 아무래도 관객들이 줄을 선다. 상패가 너무 즐비해 그래서 천대(?)받는 거실에서 님과 마주했다. 정진우 감독은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의 줄타기에서 성공한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한 때 한국 최고의 영화사인 우진필름을 통해 그 만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위대한 영화인을 선정하여 신상옥, 유현목 감독, 황정순, 김지미, 엄앵란 배우들의 영화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 행사를 가졌다. 긴 세월을 영화계에서 종사하며 큰일들을 겪은 이제 정 감독은 한국영화사의 산 증인이다.

나는 그의 조감독 출신이기도 하지만 영화 책이며 학위논문이 나올 때마다 찾아가 증정하였다. 그동안 자문을 받아왔고 때로는 처음 듣는 이야기로 나를 일깨워 주었다. 그에게 듣는 이야기는 책으로 접하기 어려운 생생한 생활담으로 미처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특히 이만희 감독과의 일화나 이우석 회장과의 인연은 새로운 이야기들이다.

그는 1955년 신상옥 감독의 현장을 견학하고, 1957년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의 투자자 겸 연출부로 본격적인 영화 일을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오랜 현장에서의 활동으로 막힘없는 달변이다. 조미령 씨의 남편 이철혁 씨가 프로듀서로서 일했던 얘기부터 김강윤, 임희재, 장사공 작가, 김덕진, 이성춘, 강범구 등의 촬영감독, 신상옥, 정창화, 유현목, 박상호, 신경균, 노필 감독에 이르기 까지 한번 시작된 영화얘기가 끝이 없다.

특히 정창화 감독의 조감독 및 제작부장, 카메라맨으로 1인 3역을 했던 때의 이야기는 내가 알기로는 세계영화사에서 그만이 갖고 있는 기록이다. 정창화 감독의 <지평선>, <대지의 지배자>, <칠공주>, <장희빈>, <대지여 말해다오> 등의 대작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35만 원이던 감독 개런티에 버금가는 20만 원을 받았다. 정창화 감독은 35만 원을 받아 임권택 등 당시 조감독들에게 나눠주면 한 20만 원 정도 남았다는데 당시 정진우 감독의 인기는 제작자들 사이에서 인정받은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는 60여 명의 전쟁영화 엑스트라를 훈련시켜 트럭 2대에 태우고 다니며 때로는 독립군, 일본군, 국군, 인민군, 중공군으로 분장 시켜가며 촬영을 했단다. 당시 실탄 사격을 해가며 위험하게 전쟁장면을 찍다가 텅스텐 전구를 합선시켜 마그네슘을 터트리는 특수효과를 고안하기도 했다. 양회를 섞은 흙이 터지면 실감이 났고 정창화 감독의 영화가 성공한 요인 중 하나였다.

임권택 감독의 <두만강아 잘 있거라> 촬영 때에는 특효를 두려워하는 배우들에게 시범을 보이기 위해 손에 화약을 올려놓고 설명을 하다가 특효팀이 잘못 터트리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손의 상처를 가리고 “아무렇지도 않구만” 하며 태연한 척하며 촬영을 마쳤다는 무용담과 파리에서 <화조>를 찍을 때 윤정희의 부군인 백건우와의 에피소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는 특별히 신상옥 감독을 존경했다. 그로서는 처음 신 감독의 영화 현장을 보았고 신 감독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산과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큰 산을 뛰어넘고자 목표를 세웠고 한 걸음 한 걸음 영화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장미와 들개>라는 영화의 예고편에 심의를 받지 않았던 장면이 문제가 되어 급기야 영화사의 허가가 취소되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그가 소식을 듣고 신필름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에도 신 감독은 촬영에 열중이었다. 그는 영화에 미친 남자였다. 정 감독도 그에 못지않은데 “감독님, 지금 영화 찍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렸지만 신 감독은 들은 체 만 체 하였다. 결국 한국 최대의 영화사는 순식간에 폐업되었다. 그런 시대에 영화를 만들었던 영화인들이 새삼 존경스러울 뿐이다.

엎친 데 덮친다고 신상옥 감독은 실종된 아내 최은희 배우를 찾아 홍콩으로 갔다가 납북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그리고 탈북과 귀국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다가 별세한 것이다. 신상옥 감독은 2006년 4월 11일 향년 79세로 별세하였다. 5일장이 치러졌고 발인은 15일이었다. 정진우 감독은 고인의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2006년 정진우 감독에 의해 출간된 '위대한 영화인 신상옥'
▲ 2006년 정진우 감독에 의해 출간된 '위대한 영화인 신상옥'

나는 중국에서 귀국하여 13일 조문을 가니 정진우 감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신필름 허가 취소 소식을 듣고 안양촬영소에 와보니 신 감독은 아무 생각 없이 촬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신상옥 감독은 모든 감독의 스승”이라고 말하며 막 출간된 책을 영전에 바쳤다.

2006년 서울대병원의 신상옥 감독 장례식장에서
▲ 2006년 서울대병원의 신상옥 감독 장례식장에서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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