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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 벗 당룡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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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 벗 당룡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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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의 당룡
▲ 2008년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의 당룡

내가 당룡을 만난 건 제12회 부천국제 판타스틱영화제가 열린 2008년 7월 19일이다. 메가토크 때 초청스타로 왕호 배우와 함께 나왔다. 그로선 1981년 이후 27년만의 대중 회견이었다. 그동안 팬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가 우연히 연락이 닿아 초청스타로 초청된 것이다. 나도 그를 추적했지만 미국에 산다는 것 밖엔 알 수가 없었다.

메가토크 후 그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고 이후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 나이는 그가 연상이지만 친구가 좋겠다는 그의 제안 때문이었다. 나 또한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2nd 브루스 리가 친구하자는데 누군들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호적상 1957년 6월 5일생이지만 53년생 뱀띠라고 했고 56년생으로도 추정된다. 당시 호적신고가 늦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와는 7월부터 8월까지 시간 날 때마다 만났다. 그가 묶던 오피스텔과 인근 지역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와 이야기 했고 그것은 『이소룡 평전』에도 수록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에 그의 이름을 딴 당룡 카페를 네이버에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는 역시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가 그동안 미국에 가있었다지만 한국에도 자주 왔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안양에 13살 아래인 남동생 김태영 씨가 살고 있었고 누이동생 세 명도 평택 등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를 하기 위해 미국에 갔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사망유희>에 출연하며 알려진 명성으로 중국인들의 다툼을 해결해주는 일을 하게 되며 본의 아니게 해결사 일을 하게 되었다. 홍콩에서 부터 미국에 가서도 그 일을 하며 그가 5개의 외국어를 조금씩 할 수 있다는 것도 이야기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영화를 잊지 않았다. LA에서 이일목 작가와 함께 쓴 시나리오 <야쿠자>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후원자들을 물색하였고 규모를 줄여서라도 국내에서 제작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음으로 해서 <야쿠자> 제작은 물거품이 되었다. 내게 기획서를 보여주며 금방이라도 제작에 착수할 듯 했지만 그의 희망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하와이에 거주하며 한국 방문은 일 년에 두 세 번씩 있었다. 그때마다 만나서 술 마시고 노래방엘 갔다. 그의 노래 실력은 그가 가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명창이었다. 그는 끼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점 모두 이소룡과 닮았다. 상황에 따라 재담으로 좌중을 웃기고 이소룡 식 무술을 시연하며 모임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항상 즐거웠다.

그는 단 한 번도 취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항시 긴장한 표정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술이 세긴 세구나 했지만 그가 결코 건강해 보이진 않았다. 피부에 검은 반점들이 보였고 음주 중 식사를 하지 않던 그의 건강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으니 스스로의 건강은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인천방송에서 취재한다고 해서 그를 좋아하는 팬들의 번개모임도 있었다. 또 이소룡기념사업회를 발족하며 시작된 세미나 첫 회 때 초청스타도 그였다. 그날 조선일보에는 그의 기사가 무려 세 면에 걸쳐 실렸다. 또 <무술의 고수> 다큐에서도 그를 취재했다. 그러나 그 촬영분은 소개되지 않았다.

이런 모든 일들이 겨우 삼 년 사이의 일이다. 누구보다도 많이 어울렸고 많은 이야기를 했기에 오래된 것만 같지만 겨우 삼 년 사이의 일이다. 그를 여러 팬들과 만나게 했고 그로 하여금 과거의 영광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그는 이제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소룡이 그러했듯이 그도 이제 전설이 된 것이다.

전 세계를 통해 공모하여 이소룡의 대역으로 선발된 그로서는 <사망유희>(1978) 이후 <사망탑>(1980), <아가씨 참으세요>(1981), 쌍배(1981)를 촬영하고 미국에서 <특명 어벤저(No Retreat, No Surrender)>(1986) 후 영화계를 은퇴하기 전까지 이소룡의 그림자로 살았다. 이소룡으로 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익혀 이소룡화 되었지만 결국 그는 이소룡의 그림자로서 옴짝달싹 못하는 이소룡의 망령에 사로잡혀 스스로 절박한 삶을 살았다. 그것은 스스로 빠져버린 이소룡의 악몽이라고 하겠다.

당룡, 그는 <사망탑>을 찍으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했던 것 이후로 김태정이길 간절히 원했다. <사망탑>의 영어제목은 <사망유희2>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제2의 이소룡이었으면 했다. 영화제작자는 물론이고 팬들마저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김태정이 겪었을 고통은 너무 큰 것이었고 그것을 내게 토로했었다.

사망탑(사망유희2)
▲ 사망탑(사망유희2)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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