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5 23:56 (목)
[안태근의 다큐세상] 글로벌 스타 당룡 ④
상태바
[안태근의 다큐세상] 글로벌 스타 당룡 ④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2010년 4월 19일, EBS를 방문한 당룡(등을 보이는 이)과 필자
▲ 2010년 4월 19일, EBS를 방문한 당룡(등을 보이는 이)과 필자

당룡은 상당한 효자였다. 그의 아버지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홍콩에서 활동할 때에도 귀국하면 방배동 아버지를 찾아뵈어 어려운 살림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부친은 국악을 하셨던 분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오며 살림살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는 2남 3녀의 장남으로 평소부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일찍 철이 들었을 것이다. 그의 막내 형제와의 나이차는 13살이었다.

그의 가족은 부산에서 처음 올라와 돈암동에 자리 잡았고 후에 남가좌동을 거쳐 방배동에 살았다. 그가 홍콩에서 가져온 옥병풍은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다. 그는 1981년 귀국을 하며 한국 액션영화의 미래에 희망이 없음을 알고 미국행을 결심했다. 당시 한국영화의 미래는 지금과 사뭇 달랐고 그의 미국행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꿈대로 갔던 미국도 그의 미래 계획을 이루기에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그야말로 힘든 이민자로서 살아야 했다. 그는 캐나다의 비자로 미국에 입국했고 훗날 미국 영주권자로 살았다. 그의 삶은 아직도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2nd Bruce Lee 즉, 제2의 이소룡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김태정이라는 자신의 본명으로 살고자 했다. 그런 결정만큼이나 현실의 생활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많은 영화자료는 미국에 남아있을 것이나 아직 그의 미국 집을 방문한 사람은 적어도 한국엔 아무도 없다. 내게 하와이에 오면 리무진을 가지고 마중 나가겠다고 했던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의 타계 소식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어쩌면 죽음마저도 이소룡과 연결되는지 그의 영구차 넘버마저도 1127로 이소룡의 생일인 11월 27일이었다. 참으로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당룡의 운구차 넘버는 이소룡의 생일과 일치했다.
▲ 당룡의 운구차 넘버는 이소룡의 생일과 일치했다.

그의 3일장은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 회원들이 함께 했기에 그도 외롭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당룡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오래이지만 아직도 환히 웃는 그의 사진을 보면 그가 살아 전화라도 걸어올 것 같다. “응, 만나...” 항상 느릿한 맥 빠진 소리로 전화를 하지만 만나면 활달해지며 우리를 즐겁게 했다.

다소 술을 많이 마셨지만 나도 그 정도를 마시니까 별로 큰 걱정은 안했다. 더구나 무술로 단련한 그였다.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왜 그리도 급하게 갔는지 아직도 그의 죽음은 믿겨지지 않는다. 많은 이들에게 쇼크를 준 그의 죽음은 우리의 기억을 넘어서 전설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래도 그는 우리의 가슴에 멋진 사나이로 남아있다. 그의 유품인 사진 및 영화자료는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운명적으로 다가와 홀연히 떠나갔다. 그는 당룡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김태정이라는 본명으로 한국영화사와 세계영화사에 영원할 것이다.

'사망유희'에서의 당룡 김태정
▲ '사망유희'에서의 당룡 김태정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