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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 벗 안태완 촬영감독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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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 벗 안태완 촬영감독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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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임권택 감독의 '족보'에 촬영부로 참여한 안태완 촬영조수(두 번째 줄 맨 왼쪽)
▲ 1978년 임권택 감독의 '족보'에 촬영부로 참여한 안태완 촬영조수(두 번째 줄 맨 왼쪽)

편의상 그를 당시 호칭인 안 기사라고 부른다. 그가 영화계를 은퇴하고 중국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했을 때에도 일 년에 한두 번은 만났다. 그는 1950년생으로 호적이 잘못되어 네 살 정도 차이가 났다고 한다. 그의 고모부는 김창수 씨로 일찍이 상해에서 현상 일을 배워 국내에서 성림현상소를 운영한다. 1920년생쯤이라고 한다.

성림현상소의 위치는 동화백화점 옆이었다는데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옆인 그곳에 동양중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도에 입사했다는데 기술만이 살 길이고 기술이 최고였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만 해도 영화계는 집안사람들의 소개로 많이 활동했다는데 김창수 씨와 처남 매부지간이며 안 기사의 삼촌이었던 안면희 씨(1934년 생)도 영화계로 진출해 20여 편을 촬영 후 안달호란 이름으로 감독활동을 했다.

그의 연출작은 1967년의 <남자는 싫어> 로 데뷔 후 1969년 <원한의 애꾸눈>, <한맺힌 여검객>, <내장성의 대복수>, 1973년 <태백산의 결투>이다. 안달호 감독은 후에 <천하태평>이란 영화도 제작하는데 이규환 감독에 유장산 카메라맨이었다. 삼춘의 덕에 안 기사는 촬영조수로 일찍 입문하는데 1968년 유현목 감독의 <아리랑>, <카인의 후예>를 거쳐 <폭풍의 사나이> 등에 참여하는데 EBS의 제작본부장을 역임한 박창순 씨도 같이 일을 했다고 한다. 박창순 씨는 이후 김수용 감독의 연출부로 일을 하다가 EBS로 옮긴다.

안 기사는 1969년에 퍼스트 카메라맨이 되는데 <원한의 애꾸눈>, <한맺힌 여검객>, <암흑가의 카네이션>, <내장성의 대복수> 그리고 신필름이 제작한 정인엽 감독, 김희라 주연의 <쾌남아> 등에 참여하는데 이 때부터 그의 사부 이석기 감독과 일하게 된다. 이석기 감독으로 말하면 원로 이병삼 기사의 조수로 시작해 안면희 퍼스트 밑에서 세컨으로 일을 했었다.

이석기 감독은 그 후 27살에 최연소 기사로 데뷔하는데 이만희 감독과 <여로>, <창공에 산다>를 찍고 대종상 촬영상을 받는다. 이 감독은 그후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잊지마>, <진짜진짜 미안해> 등 <진짜진짜 좋아해>의 시리즈를 찍는데 안 기사는 퍼스트를 맡는다.

이‧안 콤비는 그 당시 임권택 감독의 주요 대표작인 <족보>, <상록수>, <깃발 없는 기수>를 찍는데 안 기사는 조수로서도 광고 기법에 나오는 신 기법을 구사할 수 있게끔 한 몫을 담당했다는 자평이다. 그는 1970년에 해병대에 입대하는데 베트남전 참전 후에 해병대 정훈감실 공보과에 배속되어 군 교육영화 제작을 하게 된다. 1973년에 제대하고도 1975년 까지 프리랜서로 일을 한다.

▲ 1979년 정인엽 감독의 '꽃순이를 아시나요'에 촬영부로 참여한 안태완 촬영조수(두 번째 줄 왼쪽 세 번째), 앞줄 왼쪽 두번째가 주연여배우 정윤희씨.
▲ 1979년 정인엽 감독의 '꽃순이를 아시나요'에 촬영부로 참여한 안태완 촬영조수(두 번째 줄 왼쪽 세 번째), 앞줄 왼쪽 두번째가 주연여배우 정윤희씨.

그는 영화계로 복귀해 이석기 팀의 퍼스트를 계속하면서 1977년 임권택 감독의 <임진란과 계월향>, 1979년 정인엽 감독의 <꽃순이를 아시나요>, 이후 변장호 감독의 <무녀의 밤>, 정인엽 감독의 <김마리라는 부인>, <애마부인 2>, 김재형 PD의 영화 데뷔작 <춘희> 등을 거쳐 1984년 변장호 감독의 <푸른 하늘 은하수>로 데뷔하는데 최명길, 김지숙, 김민경(아역)이 출연한 동시녹음 영화이다.

당시 아리플렉스3 카메라를 신영 프로덕션에서 450만 원에 대여해 3개월가량 찍었는데 동시녹음용 블림프를 삼영영화사에서 빌려 쓰고 동시녹음을 위해 하우징을 직접 만들어 썼다고 한다. 그 공을 인정받아 촬영감독위원회에서 주는 그 해 황금촬영상에서 영화발전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변장호 감독과 대만에 가서 한 편을 더 찍는데 <사랑 그리고 이별>이다. 대만 여배우 호인몽과 신영일이 출연한 합작영화이다. 그 후 그의 대만촬영은 계속되는데 1985년 대만의 뢰상 감독과 김종성 공동감독의 <신술마술>, 1987년 고응호 감독의 <난운>, 1988년 강범구 감독의 <7소여복성>을 하비꼬미(끼워 맞추기)했단다.

위장합작을 피하기 위해 한국에서도 한 열흘 촬영하고 대만 가서도 그만큼 찍었다는데 위장합작으로 박OO 감독이 감독협회로부터 제명까지 당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어권 영화라면 흥행이 되어 위장이 성행하던 때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을 거쳐 통금이 해제되며 이후로 에로영화 붐이 일고 그의 필모그래피도 분홍빛으로 물드는데 1986년부터는 박용준 감독의 <서울의 탱고>, 고영남 감독의 <눈짓에서 몸짓까지>, 1988년 나영균 감독의 <나신들>, <복카치오>, <미아리 텍사스>, 강대하 감독의 <마야고>, <춘색>, 그리고 1988년 <보릿고개>, 1990년 <도시의 상처>, 1991년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여자>, 1992년 <13월의 겨울>, 1993년 <잃어버린 욕망>을 거쳐 같은 해 대원동화가 제작한 김완기 감독, 강문영 주연의 일본로케 영화 <뜨거운 비> 등을 촬영한다.

그는 1988년부터 89년까지 2년 연속 최다촬영기사로 일간스포츠에 소개되기도 하는데 1년에 10편 가까이 찍었단다. 그의 촬영작은 모두 40여 편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자료에는 조수기록까지 합쳐 60여 건의 관련영화가 소개된다.

안 기사가 입문하던 시절은 기사 인준제라고 해서 촬영분과위원회 회원들의 합의하에 신인을 데뷔시켰다. 따라서 촬영기사로 등극(?)하기까지 쉽진 않았다. 그는 촬영기사 막내로 활동하는 바람에 큰 감독과 만날 기회가 적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주변엔 감독 지망생과 신인감독들이 넘쳐났고 그는 기꺼이 그들과 함께 했다.

큰 감독들과의 촬영은 선배들의 몫이었고 그러다 보니 정작 그에겐 기회가 오지 않았고 일찍 은퇴하다보니 한국영화사의 걸출한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도 그의 운명일 뿐이다. 영화는 90분 기준으로 필름 1만자 가량이 들어가는데 당시에는 총 촬영 네가 필름이 2만자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2:1로 촬영한 것인데 거의가 모두 OK 샷이라는 결론이다. 참 어렵게 활동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2018년 3월에 9년 만에 만나 함께 우면산을 등산했다.
▲ 2018년 3월에 9년 만에 만나 함께 우면산을 등산했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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