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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 벗 성낙범과 위니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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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 벗 성낙범과 위니 석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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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광주테크노피아에서 있은 특강 때 성낙범 대표(사진 왼쪽)
▲ 2015년 광주테크노피아에서 있은 특강 때 성낙범 대표(사진 왼쪽)

제7회 이소룡세미나에서 '홍콩영화 최전성시대'를 발제했던 성낙범 대표는 유난히 큰 키라 금방 눈에 띄는데 성길시네마를 운영하며 홍콩영화와 중국영화 수입을 하고 있다. 그가 이소룡기념사업회에 관심을 갖는 건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발제 및 꾸준한 참석으로 우리 이소룡기념사업회에 큰 힘이 되었고 부회장직을 맡았다.

2013년 12월 제2차 이소룡 투어 때에는 동반해 홍콩을 다녀오기도 했다. 2015년 광주테크노파크 2층 회의실에서 있었던 광주CEO 대상 이소룡 특강 때에는 서울에서 와주어 참석했다. 강의주제는 감성경영 관련 이소룡 영화와 마케팅 사례 발표였다.

이소룡과 감성경영이 매치가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소룡은 뛰어난 창의적 감성으로 그의 영화를 최고 흥행작으로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원소스멀티유즈(OSMU)의 모범사례이다. 약 30여 명이 참석하여 새로이 만든 동영상의 시사와 특강 후 이소룡 영화와 마케팅에 대한 폭넓은 의견 교류를 가졌다. 지역의 가족회사 대표들이 초청되었고 호남대의 이소룡연구회의 교수들이 참석했다. 모두가 이소룡 1세대인지라 호응도는 높았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한 명이 바로 위니 석이다. 그녀의 새삼 고운 마음씨가 다시 느껴지는데 나와는 2007년 <청사초롱과 홍등>의 홍콩 촬영 때 안내를 맡은 코디네이터와 PD로 만나 7~8년을 각별히 지낸 별난 인연이기도 하다. 촬영을 도와준 그녀와는 귀국 후에도 전화나 메일 등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당시에는 지금같이 카톡이 없었을 때이다.

그리고 세계불황이 한창인 2009년 그녀도 일거리가 없다며 귀국하여 내가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렇치 않아도 만나고 싶었던 사람인데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오다니 우연치곤 너무도 특별하고 반가운 마음에 통화를 하다가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후 아래윗집에서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며 우리 식구와도 각별히 지냈다. 위니는 이소룡기념사업회 제1회 행사 때부터 참석하였고 2년 후 홍콩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아쉬운 이별을 하고 우리 사업회의 홍콩지회장으로 일해 줄 것을 부탁했다.

2013년 11월 30일 이소룡 40주기 홍콩전시회에서 위니(왼쪽)와 창다오
▲ 2013년 11월 30일 이소룡 40주기 홍콩전시회에서 위니(왼쪽)와 창다오

2014년 9월 29일 그녀가 갑자기 금연했다는 소식을 보냈다. 40일째 금연으로 두통과 편도선 이상으로 후유증이 심하다는 말인데 새삼 애연가였던 생각이 났다. 그리고 2015년 3월 12일 좀 바쁘다며 사진과 근황을 전해 준 것이 결국 마지막 카톡이었다. 결국 2014년 8월 즈음 건강에 이상을 느꼈었다는 말인데 일 년여를 고생했던 듯하다.

그뒤 카톡을 하여도 응답이 없길래 의문이었고 한참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2015년 11월에 그녀의 부음 소식을 접하고 너무 황망해 믿겨지지 않았다. 그녀가 있었기에 이소룡은 내게 더욱 큰 족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좋은 곳에서 이소룡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그녀를 생각해본다. 제80회 세미나에서 강도(江島/창다오) 배우를 2대 홍콩지회장으로 위촉하였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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