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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미궁에 빠진 안중근 의사의 유해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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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미궁에 빠진 안중근 의사의 유해 찾기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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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사형집행 보고문서
▲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사형집행 보고문서

안중근 의사는 1879년에 태어나 1910년에 순국하셨다. 만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일제의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보다 더한 형벌은 없는가?” 라며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순국이라 함은 조국과 겨레를 위한 최고의 희생이다. 그의 거룩한 죽음이 있었기에 한민족의 기개를 통해 자주독립의 정신을 만방에 알렸고 한민족이 살아있음을 알렸다.

그는 여순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1910년 3월 26일의 일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사살하고 5개월 후의 일이다. 3월 26일 오전 10시에 교수형이 집행되었으나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시간과 같은 10시 15분에 사망하였다고 발표한다. 참으로 간교한 복수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죽은 이토 히로부미의 원혼을 달래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안 의사의 시신은 침관(시신을 눕힐 수 있는 관)에 모셔져 여순 감옥 죄인묘지 어느 곳엔가 매장된다. 당시 관동도독부 보고문서를 보면 안 의사의 매장기록은 “여순 매장” 넉 자뿐이다. 여순에 매장 되었지만 정작 어느 곳에 매장되었는지가 기록된 문건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문서가 원래 부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형 보고문건을 두 가지로 만들 리 없다. 하지만 명확한 매장 장소가 없는 기록은 미완된 유해발굴의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일부 공무원들은 매장 문서를 일본이 공개하지 않고 그러한 연유로 매장지를 몰라서라고 발굴 불가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비공무원인 국민이 나서서 발굴을 주도해서도 안 된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수도 있는 문건을 핑계로 우리는 의사의 유해 발굴을 포기하여서는 안 된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없는 문건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더 이상 그런 이유에 매달린다면 의사의 유해를 찾을 희망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그 문서를 가지고 있는지도 확인이 안된 상태이고 설사 갖고 있다 하더라도 공개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일본만을 기다리며 마냥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벌써 안 의사 순국 백년을 맞았다.

그동안 우리는 물론이고 북한에서도 안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고자 노력을 했다. 김일성은 안중근을 자신 다음의 영웅으로 손꼽는다. 안 의사가 워낙에 출중한 영웅이기도 하지만 황해도 해주 출신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북한의 발굴 작업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안 의사의 매장 추정지를 탐사하였고 고구마밭으로 바뀐 지역을 보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 사실은 2008년 남북한과 중국의 안 의사 유해발굴 협의 때 자신들이 먼저 발굴 작업을 벌였음을 밝혔다. 그리고 회의에 나선 것은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8년의 유해발굴은 최서면 한국연구원장이 전 여순감옥소장의 딸인 이마이 후사코의 사진 증언을 듣고 그녀의 말을 맹신하며 벌어진 해프닝이다. 당시 어린 나이의 후사코는 일본인 묘지 지역을 지적하며 이곳에 안중근 의사의 묘가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지역을 발굴한 결과 깨진 일본들의 사기그릇만이 출토되었을 뿐이다. 그곳에 일본인 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모두 화장되었고 그 자리는 쓰레기 처리장이 되었다.

국가보훈처는 일생을 안중근 의사 연구에 바친 고 최서면 원장의 말이라 믿고 10억 원 예산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실적 없이 발굴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이 일을 추진하며 중국정부의 양해를 얻기까지 1년이 걸렸다고 한다. 뚜렷한 증거로 이마이 후사코(今正房子) 여사의 사진을 제시하고 그 지역을 찾아 탐사하였지만 결국 소득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발굴사업을 하기엔 중압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 프로그램은 국가보훈처의 노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이 있다면 시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중국 여순 어느 곳에 묻혀있을 안 의사의 유해 찾기는 오리무중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미궁에 빠져버린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다큐멘터리를 통하여 그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국내에서 최서면 원장과 같이 안 의사의 유해발굴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고 김영광 의원은 안의사 묘를 참배한 두 명의 증인과 안 의사의 묘 약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국가보훈처는 이 사실을 더 이상 허무맹랑한 전설로서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안 의사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내가 취재한 결과 거의 확신해도 좋을 만한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증언자와 함께 그 지역을 취재한 나로서는 도굴이라도 해서 안 의사의 유해 DNA검사를 하고픈 충동을 느꼈을 정도이나 도굴범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마냥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추정지역 인근에 아파트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미 공사장이 묘역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2009년에 제작된 춘천 mbc의 <안중근 북위 38도>는 이 과정을 다루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1차 발굴의 전 과정을 보여주며 실패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가 국가보훈처의 면죄부일 수는 없다.

미래의 일은 불확실하다. 나도 이번에 취재한 안 의사의 묘 추정지역에서 유해가 발굴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많은 증언자들의 진실어린 증언이 한 지역으로 일치되는데 더 이상 모른 체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안 의사 묘 찾기는 더 이상 미궁이 아니다. 얼마든지 묘 찾기의 가능성이 확보되어 있는 일이다. 안 의사는 어둔 일제강점기의 밤하늘에 이 민족의 진로를 밝혀준 등불 같은 분이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처의 미온적인 태도에 기대하는 것보다는 민간에서 모금사업이라도 벌여야 할 일이다. 지금이라도 이 민족이 정녕 안 의사의 후손이라면 그를 이국땅에 잠들게 할 수는 없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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