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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의 문학 산책] 현 인류의 몰락을 피하기 위한 문학과 예술의 소명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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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의 문학 산책] 현 인류의 몰락을 피하기 위한 문학과 예술의 소명 ②
  • 한봉수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6.0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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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의 위기에서 ‘생기生氣있는 삶’이란?

21세기는 인류에게 몰락으로 가는 위기의 시대이다. 인류는 과학 문명과 공존하며 지구를 지켜내기 위한 절박한 노력과 새로운 철학과 사상을 가져야 한다. 기계에 지배받는 노예적 상태를 피하려면 ‘인간다움’을 지켜야 한다. 인간다움이란 인간만이 가진 “자유의지와 생기있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생기(生氣)는 영원 속에 우리 생체를 만들어 주는 신(우주)이 주는 딱 한 번의 기회이다. 무한한 우주 속에 순간과도 같은 시간이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다. 이 생기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가질 수 없는 유일한 영역, 눈물과 체온이다. 생기(生氣)는 사람만이 가진 감각과 활력의 기운이다. 인류가 생존을 위한 마지막 의미이고 가치이다.

[우파니샤드]는 대우주인 브라만(梵)과 소우주인 아트만(自我)이 하나로 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세계관을 통해 인생을 사유하고 의미를 찾도록 가르친다. 아트만은 육신이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실존의 입장에서 아트만은 생명체 육신을 가질 때만이 의미(意味)의 존재이다. 생기를 가질 때, 지금 숨 쉴 때, 비로소 대우주와 대등하다.

기독교의 천국은 신도들에게 본향이다. 그렇지만 신이 단 한 번 준 생체의 삶 또한 신에게 가장 큰 행복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자유롭고 의미있는 삶 속에서 신의 사랑을 더욱 빛내 줄 수 있다. 니체가 외친 ‘신은 죽었다’는 표현은 실은 교회와 당시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비난한 것이다. 신의 임재를 증거하고 그 뜻을 실천해야 할 교회와 신도들이 전혀 신의 사랑과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는 태도를 경고한 것이다. 현실의 비참한 삶을 외면하고 내세의 구원만 외치며 교회와 지도자가 따뜻한 곳에만 안주하려 한다면 그 종교의 신이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앞장에서 말한 것처럼 세속의 부귀영화와 쾌락만을 쫓는 파우스트적 태도에 신의 목소리는 침잠해져 간다. 허무한 이데올로기는 모든 종교와 철학을 무색게 하고, 질시와 분노, 폭력 나아가 전쟁에까지 이르게 하여 수백·수천 만 명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 악마의 앞잡이가 된 파우스트보다 더 심한 죄악에 빠져 있다. 인간의 분노, 편향된 이데올로기, 공포심이 인공지능-로봇에 장착되어 누군가의 의지대로 SF Science Fiction영화에 서처럼 조정된다면 현실은 아비규환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성경 [창세기]에서 신은 에덴동산에 의미 있는 두 나무를 심고 아담에게 경계하라 가르쳤다. 선악과(善惡果) 나무와 생명 나무이다. 아담에게 모든 자유를 허락했지만 한 나무의 열매를 절대로 먹지 못하게 하고, 또 한 나무의 가지를 조금도 손상치 않도록 하라고 했다.

밀턴의 [실낙원]에 보면, 신은 천지를 모두 창조한 후 사탄과 악마 집단들이 수십억 년의 흑암 감옥에서 깨도록 허락한다. 깨어난 사탄은 부하들과 회의를 통해 신에게 도저히 힘으로는 못 당하기에 새로운 전략을 수립한다. 신이 가장 사랑하는 피조물을 꼬드겨 신의 뜻을 어기도록 하여 결국 스스로 비참하게 되도록 하자는 대담한 전략을 세우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우주 한 귀퉁이에 있는 지구별을 찾게 된다. 그 별에 신이 조성한 에덴동산 침투에 성공한다. 완고한 아담을 피해서 이브를 꼬드기고 선악과 열매를 결국 먹도록 한다. 이어 아담도 먹게 된다. 사탄은 일시적인 승리를 누리게 된다. 이때 사탄은 생명 나무에는 얼씬도 못한다. 생명의 생성과 창조의 세계에 사탄은 접근조차 못한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뜨인 인간은 이성과 자유의지를 획득했지만, 그 원죄로 인하여 숙명적인 죄악 속에서 고단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얻게 된다. 이때부터 인간을 통하여 사탄은 신에게 본격적인 태클을 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노아의 홍수’나 ‘소돔성 멸망’과 같은 근본적인 파멸을 이끌지는 못했다. 생명은 오로지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신이 사랑과 존귀를 받는 것은 생명 나무의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의 맹목에 사로잡힌 인류는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드디어 생명 나무를 건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탄의 뜻밖의 성과인가?

인류의 탐욕적 발명과 개발은 지구별에 엄청난 재앙이 되고 있다. 급기야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미세한 유전자들의 역습을 받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수많은 생명체의 생명이 위태롭다. 호모사피엔스의 시계는 언젠가 멈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더하여 인류는 제어할 수 없는 인공지능의 노예적 상황에 처해질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인류는 재물과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고 잉여에서 생긴 권태로 방황하고 있다. 잉여와 허무는 냉소와 쾌락을 자극하고 방어적 기제로서 허상 같은 표상에 끌려 집단적 맹목 의지와 이기적 쾌락에 젖어 간다. 4차에 이어 5차산업, 초예측 시대, 기술 문명의 대전환기에 우리 인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켜야 할 것은 진정한 ‘인간다움’이다. 오직 ‘생기있는 삶’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정신을 견지해야 한다.

▲ 시인, 문학평론가.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한국외대 이탈리아어와 및 정책대학원 졸업. 2020년 『착각의시학』 평론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시집 『날더러 숲처럼 살라하네』 강동구 [시로 꿈꾸는 마을] 대표
▲ 시인, 문학평론가.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한국외대 이탈리아어와 및 정책대학원 졸업. 2020년 『착각의시학』 평론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시집 『날더러 숲처럼 살라하네』 강동구 [시로 꿈꾸는 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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