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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독립유공자 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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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독립유공자 신규식
  • 안태근
  • 승인 2021.02.0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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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신규식
▲ 독립유공자 신규식

그는 상해임정의 창립 유공자로서 자신의 저서 『한국혼』에서 민족의 시조 단군을 바로 세우자고 역설한 분이다. 안중근 의사와 갑장으로 1880년(음 1879년 1월 13일)충북 문의군 동면 계산리 출생했다. 신용우의 차남으로 한의학 공부 중인 1905년 을사조약이 있었다. 이후 의병운동을 도모하다 실패해 음독한다. 그후 살아난 그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호를 예관(睨觀/외눈으로 흘겨본다)으로 했다.

그는 박식하고 중국어에 능통했는데 1900년, 육군무관학교 입학(현 육군사관학교 격)해 외국어 교육에 비중을 두고 다양한 공부를 했다. 동문인 조성환과 부패한 군부 개혁을 도모했다.

1902년 보병 참위로 임관하였고 1904년 진위대와 무관학교 견습을 마쳤다. 1905년 시위대로 옮긴 후 을사조약 체결이 이루어지자 의병 실패 후 울분을 참지 못해 자살을 꾀했다.

낙향 후 교육사업에 투신하여 문동학원 설립에 관여했다. 신백우, 신채호도 동조해 강사로 협조했다. 1908년 대한협회에 가입했고 1909년 나철의 대종교를 창시하자 입교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다시 음독, 나철이 구해줘 후에 중국 망명을 결정한다. 1911년 만주, 북경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정’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우창(무한)의거와 1911년 10월 우창혁명에 가담하여, 숭자오런(송교인), 천치메이(진기미)와 함께 혁명이 성공하며 쑨원(순원)과도 친분관계를 가졌고, 조국 독립의 희망과 확신을 갖게 됐다.

그는 1912년 5월 동제사(동주공제/서로 가까이 한 마음으로 협조하자는 비밀결사조직)를 조직하는데 박은식, 김규식, 홍명희, 신채호, 조소앙, 정인보, 여운형 등이 참여했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 지사를 두고 신규식이 본부의 이사장, 박은식이 총재 담당하며 상하이가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이 된다. 조직원 20명 중 대종교인 14명, 기독교인 4명으로 대종교 집단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국혼을 중시하는 시민민족주의, 대동사상주의로, 신아동제사를 발기하여 12월 17일에 프랑스 조계 명덕리에 '밝달(배달)학원' 개설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주도, 볼세비키 혁명 후 시회주의 만국사회당 대회에 조선사회당 이름으로 참여했다. 1918년에는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신한청년단을 설립하였다. 후에 이는 의열단으로 이어진다.

1919년 2·8운동, 3·1운동이 시작되자 9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법무총장에 임명됐다. 1920년 임정에서 이승만 불신임론을 말하며 여럿이 사퇴하나 신규식은 단결하자며 1921년에 협성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임정의 친선전권대사로 순원의 광퉁(광동)정부를 찾아 외교문서를 전달했다.

1922년에 태평양회의 결과가 일본 세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결론나자 임정의 분열상태를 비관하며 병석에 누워 9월 25일(음 8월 5일)에 순국, 상해 만국공묘에 묻혔다. 저서로 『한국혼』, 『아목루』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되었고, 1993년 국립묘지로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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