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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탕!탕!탕!]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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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탕!탕!탕!]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 안태근
  • 승인 2021.02.0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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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태근 회장(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문화콘텐츠학 박사)
▲ 안태근 회장(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문화콘텐츠학 박사)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동 시기를 살며 대한제국을 망국으로 이끈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이완용은 1858년 태어나 1926년 사망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태어나 1909년 사망했다. 우연히도 모두 68세에 사망했다.

이완용이 17년 연하인데 을사늑약 체결을 두 사람이 공모했고 이완용은 하수인으로 매국노가 됐다. 두 사람은 각기 빈곤한 집안에서 태어나 권력자나 부유한 집안에 양자로 입적한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야욕이 남달랐을 수 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출세의 기회를 잡았고 외교무대에 나섰다. 그들은 당시 강대국인 영국이나 미국과 관련이 있는데 이토는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미국에 파견되기도 했다. 이완용은 미국 참사관으로 활동했다. 둘 다 영어를 할 수 있어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고 곧 정권을 잡아 권력을 휘둘렀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태어나 1909년 사망했다. 그는 조슈(長州) 번의 스오(周防) 국 쿠마게(熊毛) 군 쓰카리무라(束荷村)에서 농민 하야시 주조(林十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민 출신으로 태어났지만 지방 하급관리인 이토 나오에몬(伊藤直右衛門)의 양자가 됐다.

그리고 구리하라 료조(来原良蔵)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제자로 공부했다. 1863년 영국으로 유학 겸 시찰을 다녀왔고 이후 1867년 무사로 직급을 받고 1868년 1월 정부의 관리가 됐다. 1886년부터 1888년까지 ‘제국 헌법 체제’를 구축하고 천황의 최고 고문기관으로 추밀원(樞密院)이 신설되며 초대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1892년 두 번째 총리대신으로 임용되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한국의 국왕 위문 주한 특파 대사로서 한국을 방문했고 1905년 10월 한국 왕실위문 특파대사로 임명되어 수행원 스즈키 게이로쿠(都筑馨六) 등과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그는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5년 12월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초대 통감에 오른다.

그는 1909년 미국의 만주 진출에 대처하기 위해 만주를 시찰하러 하얼빈을 방문하여 10월 26일 09시에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척살됐다.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진 장례식 후 도쿄 오오이초(大井町)에 묻혔다.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며 천 엔(千円) 지폐에도 도안됐다.

이토의 계획 하에 당시 조선과 청나라에 대한 침략 야욕을 실행했고 이완용은 그런 이토와 결탁하여 대한제국을 패망에 이르게 하는 을사늑약의 서명을 주도 한다.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같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토가 결국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고 이완용은 이재명 의사에 의해 자격(刺撃)을 받은 것이다. 이완용은 폐를 다쳤으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두 사람 모두 당대 권력의 수혜자로 권력의 실세가 되어 의롭지 못한 행위에 응당의 처단을 받은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잘못 주도하려던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여러 가지이지만 악행으로 처단을 받은 공통점이 두드러진다. 이렇듯 흡사한 인생행로를 걸은 두 사람의 공통점은 우리 역사의 죄인들의 말로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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