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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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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도산 안창호
  • 안태근
  • 승인 2021.03.1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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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1905년, '공립신보(共立新報)' 발행하며 교포들의 생활향상 및 의식계몽에 힘써
안창호 선생
▲ 안창호 선생

안창호 선생은 1878년생으로 1938년 별세했다. 안 선생은 평양 출신으로어려서는 한학을 배웠고 일제의 침략으로 민족주의사상을 갖게됐다. 이어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상경하여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운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기독교인이 됐다.

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아 각지를 다니며 대중연설을 통해 민중의 각성을 촉구했다. 안중근 의사도 이 연설을 듣고 공감한 바 컸다고 전해진다. 그는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윤치호·이승만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했으며,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근대학교인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했다. 민족의 힘을 기른다는 목표였다.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1905년 4월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했다. 여기에서 야학을 개설, 회원들을 교육시키고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여 교포들의 생활향상 및 의식계몽에 힘썼다.

1905년 그는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이듬해에 귀국했다. 귀국 후 1907년에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인재 육성에 힘썼다.

안 선생은 1909년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척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었다가 중국을 통해 191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어 1913년 5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하고 19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장에 선출됐다.

그는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았다.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했으며,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 사업을 추진했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이동녕·이시영·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했다. 그러나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됐다.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년 6개월 만에 가출옥하여 지방순회 후 1937년 6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 중, 같은 해 12월에 병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별세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며 망우리에 안장하였다가 1973년 도산공원(島山公園)으로 이장, 안장됐다. 안창호의 교육사상은 교육을 통하여 민족혁신을 이룩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흥사단은 1913년 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로 지금도 그의 정신을 기려 서울 대학로에 본부를 두고 활동 중이다.

▲안태근 회장(안중근 뼈대찾기사업회)
▲ 안태근 회장(안중근 뼈대찾기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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