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3 20:52 (화)
[인터뷰] "영웅,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안태근 회장
상태바
[인터뷰] "영웅,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안태근 회장
  • 김충식 기자
  • 승인 2021.03.23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우리가 지목한 장소 발굴 꼭 해낼 것"...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기 기념 인터뷰서 밝혀
▲ 안중근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안태근 회장
▲ 안중근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안태근 회장

[한국공정일보=김충식 기자]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가 발족된지 11년째다. 이 단체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봉환해 오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 단체다. 그는 EBS PD 시절인 2010년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찾아낸 바 한국방송 사상 최초로 보도했다. 그러나 11년이 지난 지금, 아직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안 의사의 의거일 뿐 아니라 사형선고일을 발렌타인데이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돌아와도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그러나 그러함에도 마땅히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서 한국으로 봉환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한국혼과 민족정신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수많은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가치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다음은 안태근 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돌아오지 못하는 안중근.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제공
▲ 돌아오지 못하는 안중근.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제공

 

Q1. 오는 3월 26일이 안중근 순국 111주기입니다. 안중근 의사 서거일(순국일)과 사형 선고일(2월 14일)을 헛갈리는 분들이 많은데요. 두 날의 차이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A)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의거일입니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습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910년 3월 26일 의사는 순국하였습니다. 뤼순 법정에서 진행된 재판은 일제의 정해진 수순에 따른 것입니다. 사형선고일은 2월 14일이며 사형이 집행된 순국일은 3월 26일입니다. 올해가 벌써 111주기입니다. 이렇듯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은 3월 26일이며 형 집행은 오전 10시에 시작되었고 마지막 묵념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 후 10시 4분에 교수형이 집행됐고 일본인 검시의에 의해 죽음이 확인된 것은 10시 15분입니다.

Q2. 안중근 의사의 서거 이후 아직도 안 의사의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오지 못했는데요. 왜 그렇게 됐는지 그 과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A) 안 의사 유해발굴은 우리 민족의 숙제입니다.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시고 아우들은 일제에 의해 사체 반환 요구가 묵살되고 감옥 뒷산에 매장됐습니다. 김구 선생은 안 의사의 친동생인 안정근에게 발굴의 임무를 맡겼으나 이루지 못했고, 1948년 김일성과의 회담시 제안했으나 역시 묵살됐습니다. 그리고 세인의 관심에서 잊혀졌으나 1970년 순국 50년, 박영록 국회의원이 유해 환국을 추진하며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도 이에 고무되어 안 의사의 조카 안우생이 김일성의 지시로 1979년(연도는 부정확함) 여순을 답사했으나 묘역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그간의 경위입니다.

1984년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환국을 추진 계획 발표, 재중공독립투사유해봉환추진위원회 구성.

1986년 북한 유해발굴단 두 번째 조사.

1989년 10월 한국정부 조사단 여순 방문.

1992년 중국과 수교후 1998년 후진타오 부주석의 유해 발굴협조 의사 표시.

2000년 3월 천주교단 안중근 의사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 발족, 송영순과 사이토 미치노리 중심이된 안중근의사유해발굴위원회 발족.

2000년 정의구현사제단 중심으로 안의사 유해발굴 및 환국추진위원회 발족.

2001년 김영광 의원 중심의 안의사 유해봉환위원회 발족.

2004년 11월 노무현 대통령, 원자바오 총리에게 협력 요청.

2004년 12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 중국 외교부장 리자오싱에게 요청, 최서면 안중근의사묘역추정위원회 활동.

2005년 10월 정부 최서면의 주장 반영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추진사항 발표.

2006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유해발굴 입장 표명.

2007년 3월 한중친선협회 이세기 회장 발굴 예정 발표.

2007년 4월 10일 개성에서 안중근 의사 공동발굴 및 봉환을 위한 제4차 실무회담에서 남북공동발굴단 구성 합의.

2008년 1월 외통부 유해발굴 작업 중국에 협조 요청 발표.

2008년 3월 북한 유해발굴 불참의사 통보.

2008년 3월부터 4월 27일까지 유해발굴 착수, 실패.

2010년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발족 현재 활동 중.

참으로 지난한 안 의사의 유해찾기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선대의 실패를 참고로 우리가 지목한 장소의 발굴을 꼭 해낼 것입니다.

▲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뭍힌 자리를 기억하고 알려주는 이국성 씨. "여기입니다"라는 그의 말에 안 회장은 "아!"라며 감탄과 탄식의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고 했다. 자료제공=안태근 회장

Q3. 안 회장님은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중국 뤼순까지 갔었고,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곳까지 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때의 과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A) 안 의사의 마지막 소원은 고국 땅에 영면하는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후손으로서 마땅히 그분의 유언을 받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우리들은 의사의 순국 111주기를 맞는 오늘날까지도 그분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음은 통곡할 일입니다.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 국내로 봉환하고자 하는 목적 아래 구성된 시민 단체로써 몇 년 전부터 안 의사의 유해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들을 답사하고, 관련 문헌과 증언자들을 수소문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제가 EBS PD로 있었던 2010년 마침내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찾아낸 바 한국방송 사상 최초로 보도한 바 있습니다.

저는 안 의사 유해 발굴 담당 부처인 국가보훈처에 지속적으로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제안을 하였으나, 국가보훈처에서는 “뚜렷한 증거와 증언이 없이는 발굴이 불가능하다”는 말로 제안을 외면했습니다.

본 회가 지목한 지역이 안중근 의사 유해 매장지라는 뚜렷한 증거와 증언이 충분히 확보된 상황임에도, 국가보훈처가 위와 같은 답변으로 우리의 제안을 회피하는 것에 대해 저는 직접 발굴에 나서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제안을 외면하는 국가보훈처에 언제까지 발굴 제안만 하며 기다릴 수는 없다고 판단했고 마침내 안중근뼈대찾기사업을 ‘민간 주도 사업’으로 전환하여 추진할 것을 결의해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교수, PD, 사업가, 대학생 등 다양한 계층의 민간 인사들로 임원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논의 끝에 빠른 시일 내에 안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국내로 모셔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 중국 뤼순 감옥 근방에는 묘지, 구역을 알리는 비석이 놓여 있다.
▲ 중국 뤼순 감옥 근방에는 묘지, 구역을 알리는 비석이 놓여 있다.

Q4. 지난 19대 대선에서 각 당의 후보들에게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올 것을 제안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의 과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A) 당시 각 당의 관계자들이 찾아와 관련 자료를 건네주고 당위성을 설명했었습니다. 모두 “알겠다”고 하며 돌아갔지만 정작 그 누구도 이후 소식을 전한 이는 없습니다. 문재인 후보가 효창공원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유해발굴의 의사를 밝혔습니다만 지금까지도 안되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입니다.

Q5.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함으로써 일본의 제국주의의 종식을 앞당긴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온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안 회장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A) 안 의사는 법정에서 이토를 쏜 이유 15가지를 들며 이토의 죄목을 열거했습니다. 황후를 시해하고, 황제를 폐위하고, 군대를 해산하고... 그것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죄목들이였습니다. 안 의사는 독립군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원흉 이토를 총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는 하얼빈에서 뤼순으로 옮겨와 재판을 하고 사형에 처했습니다. 안 의사는 32살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안 의사의 뼈대를 고국에 모셔와야 합니다. 그것은 한국혼을 찾아오는 일과 진배없습니다. 그분의 정신은 곧 한국의 정신이며 우리의 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6. (현재 중국은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고 있고, 일본은 우익을 중심으로 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가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우린 여당의 ‘적폐 청산’과 ‘소득불균형’, ‘LH 부동산 투기’, ‘서울, 부산 전 시장의 미투 사건으로 재보선’, ‘코로나 펜데믹’ 등 여러 가지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주창했던 ‘동양평화론’에서 현 정세를 살펴보면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이 있을까요?

A) '동양평화론'은 완성된 글이 아니지만 그분의 생각과 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요지는 한·중·일 3국이 협력하여 공존하며 발전하자는 내용입니다. 그것이 곧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국제 정서를 아우르는 뛰어난 식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사의 이런 평화정신을 되새겨 정치인들은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국가를 쇠퇴시키는 일들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Q7. 안중근 의사에 대해 상식적으로 알려진 것 외에 이분의 정신, 업적 등에 대해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설명해 주십시오.

A)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습니다. 세 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진 이토는 절명을 하였고 안중근 의사는 대한국독립운동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토는 1841년생이며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대륙을 넘어서 아시아를 아우르는 대동아공영권을 꿈꾼 침략자였습니다. 그는 1905년 11월 특명전권대사로 대한제국에 부임한 뒤 대신들을 강압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민족의 원흉이기도 하며 일제의 통치기관인 조선통감부의 초대통감으로서 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이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조국의 주권을 되찾고자 독립운동에 뛰어든 안중근에게는 이토는 용서할 수 없는 조국과 민족의 원흉입니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 출생입니다. 그는 문명의 대변혁기를 겪으며 밀려오는 외세에 풍전등화 격이 되어버린 조국의 미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심하였습니다.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틈에서 자주권 없던 시기인 1895년,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당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벌어집니다. 16살이었던 안중근은 비분강개하며 그 시기 카톨릭에 귀의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게 됩니다.

27세인 1905년에는 구국활동을 위해 상하이를 방문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였고 부친상을 당하여 귀국하였다가 28세에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여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고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구국영재 양성에 힘쓰게 됩니다.

그렇게 교육에 힘씀에도 불구하고 1907년 이후 일제의 수탈은 본격화됩니다. 외교권을 빼앗기고 군대마저 무장해제되자 청년 안중근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구국의 의지로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의병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의 직함으로 항일투쟁을 결행합니다. 1908년에는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을 하여 승리하였고 포로를 석방해주며 습격을 당해 참패하기도 하였습니다.

구사일생의 위기를 겪은 안중근은 1909년1월, 러시아의 연추(煙秋, 현 크라스키노)에서 11인의 동지와 구국의 의지로 왼손의 넷째손가락을 단지하는 단지혈맹(斷指血盟)을 맺게 됩니다. 그때 이토가 만주시찰을 위해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이토 척살을 도모합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10시, 대륙 진출을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역에 도착하고 환영행사가 시작되며 열차에서 내린 이토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됩니다.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번 외친 안중근은 러시아 관헌들에 의해 선선히 체포되어 일제에 인도되었고 10월 30일 하얼빈 일제 공사관에서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사의 첫 조사를 받는데 일제는 자신들이 재판을 유리하게 진행하고자 안중근을 관할지인 중국 여순(뤼순)으로 압송합니다.

안 의사는 4개월여 심문과 재판을 받고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게 됩니다. 그는 일제의 회유와불법 재판에 대해서도 항소하지 않고 의연히 죽음의 길을 택합니다. 어차피 전세계에 일제의 한국 침탈이 부당함을 알렸기 때문입니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지바 도시치(千葉十七) 간수 등 주변 일본인들에게 감동과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자서전의 집필을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동양평화론의 집필에 몰두하였으나 미처 완성치 못하고 이토 사살 후 5개월 만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31세로 순국하였습니다.

▲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묻혔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 우측 노란색 원.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민족혼을 보여준 손꼽히는 영웅입니다. 따라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많은 콘텐츠가 제작됐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상하이로 간 한국인들에 의해 ‘애국혼’이라는 첫 전기영화가 만들어졌고 중국에서도 ‘잊지못할 하얼빈’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광복 후 한국에서도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의사 안중근’, ‘도마 안중근’이 만들어졌고 북한에서도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제작하였습니다.

저도 1990년 국군홍보관리소에서 홍보영화로 ‘대한국인 안중근’을 만들었고 PD시절인 2010년, 안중근 의사 순국100년을 맞아 EBS에서 어린이 드라마 ‘대한국인 안중근’, 2011년 EBS다큐멘터리 ‘안중근 순국백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도 뮤지컬 ‘영웅’이나 연극 ‘도마’ 등이 공연되고 있습니다.

Q8. 내년(2022년)에 대선이 있습니다. 대선 후보들에게 다시 안중근 유해 찾는 일에 대해서 제안하실 계획이 있습니까? 있으시다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제안하실지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A) 2008년 당시에는 직접 땅을 파며 유해발굴을 해야 했지만 이제는 지표 투과 레이더(地表透過-Ground Penetrating Radar, GPR]를 통해 사전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표 투과 레이더는 광대역 전자기파를 지표면이나 구조물의 표면에 입사시킨 후, 연속적으로 매질 경계면에서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파를 수신하여 매질 특성을 영상화함으로써 지하 매질에 존재하는 대상물의 위치, 물성, 크기, 경계 등을 찾는 최신 물리 탐사 기법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단서로 지표투과 레이더 조사가 가능합니다. 첫째, 안 의사는 일반 죄수와 달리 침관에 안치되어 매장됐습니다. 일반 죄수의 경우 대바구니(통관)에 앉은 형태로 매장되어 있습니다. 통관은 일본의 전통 매장 풍습의 하나로 수많은 사형수들을 안 의사와 같은 침관으로 매장하기가 힘듦으로써 일반 사형수를 이같이 처리했을 것입니다.

둘째, 안 의사는 흰 한복에 천주교인으로서 십자가를 걸었습니다. 목걸이형 십자가를 나무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금속으로 만들어지므로 이는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사형수와 함께 묻힌 유리병 안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약병으로 추정되는 이 병이 모든 사형수들과 함께 매장되어 있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주요 인사들의 경우 넣어졌으므로 기대해 볼 수는 있습니다. 이름 글씨를 지표 투과 레이더로 확인할 수 없겠지만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이름표는 안 의사의 유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외 단지한 왼손가락도 증거이긴 하지만 오랜 세월에 진토되었을 것이므로 기대하긴 힘듭니다.

우리는 2008년 안 의사 유해 찾기 첫 발굴에서의 시행착오를 겪은 바 있습니다. 이제 지표투과레이더(GPR)조사 기술의 활용으로 안 의사 유해발굴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안중근 의사의 가묘. 효창공원에 모셔진 안중근 의사의 묘는 가묘이다. 안 의사의 유해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제공=안태근 회장
▲ 안중근 의사의 가묘. 효창공원에 모셔진 안중근 의사의 묘는 가묘이다. 안 의사의 유해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제공=안태근 회장

 

Q9. 안중근 유해를 찾기 위해 설립된 ‘안중근 뼈대찾기사업회’의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이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지 설명해 주십시오.

A) 우리 사업회는 순수한 민간조직입니다.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생각지 않고 일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국이라 대외활동에 한계가 있지만 지금도 줌을 통해 비대면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는 안 의사 유해 발굴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알리고 우리 사업회에 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Q10.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A) 안 의사의 매장 장소는 안 의사 묘 참배자인 고 신현만 씨나 이국성 씨가 이구동성으로 안 의사의 묘가 있었던 장소라고 지목한 바 있는 곳입니다. 그 외 그 장소가 안중근 의사의 묘라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검시의(檢屍醫)의 후배가 쓴 회억록, 35년간 여순감옥구지박물관에서 근무한 판모종(潘茂忠)의 증언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증언만 있어도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인데 이렇듯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검토하고 답사한 결과 이 장소는 99% 확신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만에 하나 시신이 100년여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없어졌을 경우도 있고 이미 타인의 손을 타서 발굴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흙이라도 모셔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안 의사 유매 매장 추정지를 발견하여 ‘안중근 순국 백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송한 바 있습니다. 더구나 이 다큐멘터리는 2010년 3월에 한국프로듀서연합회에서 주는 '이달의 PD상'까지 받았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세 사람의 증언자가 남긴 지도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지목하는 한 곳을 추적한 프로그램인데 국가보훈처는 오픈 마인드로 이 지역의 발굴에 착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그런 지역을 찾아내어 발굴하여야 할 당사자들이 정확한 증거가 아니라며 이런 사실들을 외면하고 회피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장소가 안 의사의 유해 매장지가 맞다고 우리 정부의 주무부처인 국가보훈처에 열 차례 가까이 제안을 했지만 의례적인 답변만을 들었습니다. 청와대 신문고에도 제안했으나 지금껏 마찬가지 답변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언제나 답변자는 국가보훈처의 담당자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우리 보다 먼저 안 의사 탄생 100주년인 1979년에 처음으로 발굴을 시도했습니다. 우리가 지목하는 그 장소를 찾아갔던 것인데 고구마 밭으로 변한 것을 보고 묘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별 성과 없이 돌아왔습니다.

2008년, 남북 공동으로 추진했던 유해 발굴 사업 때 북한 대표인 정종수가 이 지역은 아니라고 발표했고 국가보훈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지역의 발굴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 장소를 배제한 채 10억 원 규모의 발굴사업을 벌였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즉 엉뚱한 지역을 발굴했던 것인데 일본인 묘역을 발굴하여 도자기 파편만 나왔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지금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발굴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직접 발굴하여 조사하지 않은 내용은 어떠한 말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고 김영광 전 의원이 그러했듯이 어떠한 증언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기 시작하면 누구의 증언도 채택될 수 없습니다.

▲ 중국 대련 영사관 주최의 세미나에서 안태근 회장(가운데)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중국 대련 영사관 주최의 세미나에서 안태근 회장(가운데)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저는 여순감옥 동쪽의 샹양가 공동묘지 죄인묘역이 안 의사의 매장지라고 확신합니다. 국가보훈처는 2008년 발굴실패에 대해서 더 이상 부담감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부담감을 갖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것은 이를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전의 노력으로 발굴에 힘써 더 이상 안 의사에 대한 후손된 도리를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이제 발굴하여야 합니다. 99%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이런 제보를 더 이상 남북한이 모두 아니라고 합의했다는 말로 마무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국가보훈처가 말하는 정확한 증거라 하면 일본의 보고문건입니다. 그러나 이미 보고문건은 저나 국가보훈처도 갖고 있으며 이미 EBS가 제작 방송한 ‘안중근 순국 백년’ 다큐멘터리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안중근 금일 사형, 여순에 매장” 이 보고는 일제의 관동도독부가 본국에 보고한 문건입니다. 더 확실히 매장지를 지목한 문건은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는 미확인 문건입니다. 이 문건은 본 사람도 없고 확률상으로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 이미 안 의사의 매장 보고 문건이 있기 때문이고 같은 일로 다시 보고할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러한 문서를 본 사람도 없거니와 실재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도 없는 그러한 비밀문건이 나와야만 발굴사업을 본격화하겠다는 것은 발굴 의지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무책임한 일일 뿐입니다. 관계자는 새로이 시작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이 제보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일본도 공식적으로 그런 문건이 없다는 것이고 간혹 우호적으로 찾아보겠다고 말하는 관료들은 사실을 모호하게 해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태도를 보아서야 대답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대답할 기회가 온다면 "찾아보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해버리면 그만인 상황입니다.

그런 저런 일로 벌써 안 의사 순국 111주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도 국가보훈처는 감나무 밑에 누워 책임감 없는 일본인들의 대답을 기다리며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업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없습니다.

계속해서 거론된 안 의사의 매장지는 결국 한 번도 발굴되지 않고 배제된 상태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모두가 알면서도 발굴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지금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올해 112주년을 맞는 안 의사의 의거일인 10월 26일 전까지 가능하다면 유해발굴이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열망은 우리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의 생각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의 목표는 안중근 의사의 뼈대찾기와 환국입니다.

더 이상 시간을 소비할 수 만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국가보훈처는 이 사업에 바로 착수해야 할 것입니다. 단 1%의 가능성을 가지고도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국가보훈처의 이런 마이동풍 식의 태도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