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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① 영웅 안중근(安重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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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① 영웅 안중근(安重根)
  • 안태근
  • 승인 2021.03.26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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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감옥 이송 후 안중근 의사
▲ 여순감옥 이송 후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이듬해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날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감옥 밖에는 형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두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집필 중이었다. 한·중·일 3국이 서로 화합하여 세계 평화를 위하자는 내용이다. 원고는 이제 서론을 마쳤을 뿐이었다. 지바 도시치 간수는 그에게 진작 비단을 넣어주며 유묵을 원하였다.

의사는 그 비단을 앞에 놓고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았다.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이처럼 의로운 죽음은 다시없을 것이다. 한 획 한 획 써내려간 유묵을 바라보는 지바 간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머리에 용수를 쓴 의사가 형장으로 향했다. 그들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의사의 가슴 속에는 온 국민이 외치는 “대한독립 만세!!!”가 울려 퍼졌다.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묻는 말에 의사는 “동양3국은 협조하여 동양평화 이루기를 소망한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31살의 젊은 나이로 조국을 위한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인다. 이때가 오전 10시, 하얼빈에서 이토를 사살한 시각이었다. 일제의 치밀한 계획 하에 의사는 조국에 목숨을 바친다.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를 두고 먼저 가는 자식의 심정과 또 2남 1녀의 어린 자식과 홀로 남을 부인에 대한 연민의 정은 어떠했을까? 조국에 대한 사랑, 독립에 대한 굳은 의지가 그를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의사의 시신은 끝내 두 동생에서 인계되지 않았다. 시신마저 가족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두 아우는 일제 관헌에 의해 여순역에서 열차에 태워져 쫓겨났다. 의사의 시신마저도 두려운 일제였다. 관동도독부는 본국에 최종 보고서를 보냈다. “안중근 금일 사형, 여순에 매장”.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그날 저녁 술파티를 벌였다.

관동도독부의 안중근 사형보고서 문건
▲ 관동도독부의 안중근 사형보고서 문건

의사는 3월 26일 낮 1시경 여순감옥에서 500m 떨어진 수인묘지 2열 끝에 묻혔다. 시신은 대나무통에 묻힌 다른 죄수들과 달리 침관에 안치되었다. 추정이지만 당시 관례에 따라 고인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유리 약병도 들어있을 것이다. 또 그가 천주교 신자이기에 십자가 목걸이도 단서이다. 이 정도라면 현대의 과학기술인 지표투과레이더(Ground Penetrating Radar) 조사로 얼마든지 추적이 가능하다.

여순감옥 수인묘지 제2열, 이와 같은 상태로 매장된 시신은 안 의사뿐이다. 우리는 더 늦지 않게 의사의 시신을 발굴해야만 한다. 벌써 111주기, 의사는 더 이상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의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나?”

▲ 안태근 회장(안중근 뼈대찾기사업회)
▲ 안태근 회장(안중근 뼈대찾기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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