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우석 회장은 무도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무예사랑은 오래되었고 영화에서도 구현되었다. 그는 일찍이 김운용 국기원 초대원장과 교류하며 국기원 이사를 오랫동안 역임하였다. 그런가하면 <바람의 파이터>로 소개된 최배달과도 교류하며 그의 일대기 영화 제작을 모색하였다. 지금은 진종오 회장이 이끄는 사)세계통합무술연맹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동아수출공사는 85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그중에서 무예영화 장르를 많이 제작하였다. 그가 제작한 첫 번째 영화도 김시현 감독의 <황사진>(1973)으로 무예영화였고 그 외 <일대영웅>(1973), <마지막 다섯손가락>(1974), <위험한 영웅>(1974), <밀명객>(1976), <흑룡강>(1976), <일격필살>(1977) 등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그런가 하면 홍콩의 골든하베스트의 주요 액션영화를 수입하여 한국에 홍콩영화 붐을 일으킨다. 그것은 단순하거나 우연이 아니었고 그의 영화 수출의 안목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홍콩에 지사를 둔 것도 영화사 중에서는 동아수출공사가 처음이었다. 영화진흥공사가 설립한 홍콩지사를 인수하여 한국영화 수출과 수입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소룡의 홍콩영화 컴백작인 <당산대형>이 그의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외화 쿼터가 20개로 한정되어 있었던 시절이라 마음대로 외화 수입을 할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당산대형>을 추천하였으나 선뜻 수입하려는 영화사가 없었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은 이 영화를 수입하려고 명보극장의 다음프로로 선정했다. 그러나 신상옥 감독은 <외팔이> 시리즈로 한국에 많이 알려진 장철 감독의 신작 <권격>을 수입하며 <당산대형>의 수입은 보류되었다.
결국 이소룡 사후인 1973년에야 <정무문>이 개봉되며 한국영화계에 이소룡 영화 선풍이 불며 <당산대형>은 뒤늦게 수입되기에 이른다. 그의 안목은 성룡의 출세작인 <취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의 수입을 적극 추천하여 연방영화사가 수입하여 1979년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영화수입 자유화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다.
이 회장은 골든하베스트의 레이몬드 초우 회장과 상호 방문하며 교류하여 신작들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하며 수입하여 그의 소유한 동아극장에서 개봉하여 대박을 터뜨린다. 당시는 성룡이 독주하던 시대이며 성룡의 인기는 이소룡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성룡은 이 회장을 양아버지로 모셨고 그의 전성기는 이 회장에 의해 지속되었다.
이 회장의 선구적인 노력은 이소룡의 유작인 <사망적유희> 완성에도 기여한다. 닮은 꼴 배우인 김태정을 픽업하여 이소룡의 대역배우로 추천하여 그가 이 영화에서 이소룡 역을 맡기에 이른다. 부산에서 올라온 김태정으로서는 하늘의 도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이소룡 대역배우가 되어 이 회장과 홍콩으로 간다.
이소룡 감독의 <사망적유희>의 후속감독으로는 <용쟁호투>를 감독한 로버트 클로우즈 감독으로 낙점되었다. 당시 골든하베스트의 정창화 감독에게 우선 의뢰되었지만 “이소룡이 만들던 영화는 감독하고 싶지 않다.”고 사절하며 결과적으로 로버트 클로우즈 감독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당룡은 3년여를 호텔에서 지내며 <사망적유희>의 마무리 촬영을 하였다. 드디어 영화는 ,사망유희>라는 제목으로 1978년에야 전세계에 개봉된다. 이 영화 완성에서 이 회장의 기여도는 막대하였다. 그러한 후광 덕에 김태정은 당룡이라는 예명으로 세기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김태정으로서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주어진 <사망탑>에서 대역배우의 한계를 실감하며 이소룡 캐릭터에 불만을 드러내고 촬영 중 삭발하는 소동을 일으킨다. 오사원 감독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고 당룡의 머리가 다시 자랄 때까지 촬영을 보류한다. 이 사건으로 문제아가 된 당룡은 <사망탑> 완성 후 귀국하여 동아수출공사가 제작하는 <아가씨 참으세요>에 출연한다. 그 후 미국으로 떠나 지리한 이민생활을 하던 당룡은 2011년에 생을 달리하며 대역배우로서의 영화인생을 마감한다.
이 회장으로서야 답답한 일이었지만 당룡이 결정한 일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회장은 지금도 당룡의 일화를 내게 수없이 이야기하며 아쉬워한다. 당시 배우 관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했던 시절에 벌어진 일로 당룡 배우의 사례는 배우의 자기 관리와 본격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23년 9월 22일 미국에서 5년 만에 귀국한 바비 김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바비 김은 <죽음의 승부>(1975), <만주인의 복수(Manchurian Avenger)>(1982), <킬 라인(살귀/Kill Line)>(1989)으로 알려진 글로벌 스타이다. 이 자리에는 <취권>의 황정리 배우도 동석하여 오랜만의 만남으로 화기애애한 대화가 있었다. 1979년라면 거의 사반세기 전인데 당시보다 다소 살찐 황 배우를 명함의 과거 사진과 번갈아 보며 몰라보겠다며 놀라워했다.
이 회장은 자신의 의도대로라면 성룡과 같은 한국 스타의 출현도 가능했고 한국무예영화도 세계적인 장르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쉽지만 그의 노력은 타 장르로 실현되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일본영화 앞지르기 프로젝트는 도쿄에서 개최된 아시아영화제에서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1985)이 최우수작품상을 받으며 실현된다.
동아수출공사와 이우석 회장은 모두가 경원시하며 외면했던 무예영화 장르에서도 꾸준한 노력을 하였고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는 한국무예배우들을 아끼고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 일과 한국영화100년사 연구회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 회장은 해마다 영화배우 송년회를 개최해오고 있는데 올해에는 한국무예배우 송년회를 따로 개최해봄직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