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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② 영웅 윤봉길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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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② 영웅 윤봉길 의거
  • 안태근
  • 승인 2021.04.29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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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전 윤봉길 의사
▲ 의거 전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25세인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상하이 홍커우 공원 행사장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켰다.

윤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의 의거는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19년 3·1독립운동, 1929년 광주 학생독립운동에 이은 우리 민족의 독립 염원을 보여준 쾌거였다.

윤 의사는 3·1독립운동 이후 12살이던 의사는 일제의 식민지교육을 거부하며 덕산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한다. 그리고 매곡 성주록의 오치서숙(서당)에서 공부하며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신문물과 신사상을 접한다.

윤 의사는 15살에 배용순 규수와 결혼하고 19살에 오치서숙을 졸업하고 농촌계몽 및 부흥운동을 시작한다. 당시의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꿈꾸었던 조국의 독립운동을 농촌계몽활동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농지수탈에 대한 문제의식이기도 했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집필하고 야학당의 교재로 활용했다. 1929년 4월 23일 농촌부흥을 위한 부흥원을 세우고 월진회를 만들어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새 세상을 염원하던 그의 선구자적 행동인 셈이다.

의사는 야학을 활성화하고 농민계몽운동을 시작하나 일제의 감시망을 피할 수 없었다. 일제가 야학을 강제 폐쇄하자 의사는 독립운동의 거점인 상하이로 갈 것을 결심한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대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그가 중국으로 향한 건 23세이던 1930년이다. 이미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지만 그에게 조국 독립만큼 우선하는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는 칭다오를 거쳐 상하이의 임시정부청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과 만나게 된다. 조국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김구 주석은 1931년 10월 의열투쟁을 위한 결사대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일제에 무력으로 응징할 것을 계획한다. 단원인 이봉창은 일왕을 처단하고자 1932년 1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투척하나 의거는 미수에 그친다. 윤 의사는 드디어 김구 주석과 만나 한인애국단에 입단한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을 행사장에서 일본군 장성 및 관리들을 향해 도시락 폭탄을 투척한다. 의사의 활동상은 보도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의거를 높이 본 중국 국민당의 장계석 총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윤 의사는 헌병대의 심문을 받고 1932년 5월 25일 일본군법정에서 사형을 구형받는다. 의거 27일만의 일이다. 11월 20일 오사카 형무소로 이송된 의사는 12월 19일 가나자와의 공병작업장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윤 의사의 나이 불과 25세의 일이다.

광복 후인 1946년 3월 6일, 윤 의사의 유해를 가나자와의 공동묘지 길 한복판에 암매장된 의사의 유해를 발굴한다. 그리고 봉환되어 서울 효창원의 삼의사 묘역에 안장된다.

벌써 의거 89주년, 의사의 순국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조국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그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의 조국은 안녕하신가?”

▲안태근 회장(안중근 뼈대찾기사업회)
▲ 안태근 회장(안중근 뼈대찾기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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