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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④ 을미사변(乙未事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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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④ 을미사변(乙未事變)
  • 안태근
  • 승인 2021.10.0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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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과 민비
▲ 흥선 대원군과 민비

조선조 말에 있었던 부패, 무능의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며 오늘 직접적으로 한국의 운세를 점치게 한다.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기록된 민비시해 사건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에 일제의 하수인인 낭인 집단이 경복궁에서 자행한 조선왕후 살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도자가 무능하면 어떻게 나라가 무너지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건의 시작은 민비 간택에서 시작된다. 500년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항시 위협적인 존재들이었던 왕비의 외척 세력들의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흥선 대원군은 이를 염두에 두고 외척의 피해를 덜 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민자영을 며느리로 들인다.

그러나 궁궐로 들어온 민비의 행실은 대원군을 경악시킬 일들의 연속이었다. 대원군을 내치고 무능한 왕실의 실권을 장악하고 무능한 남편인 군주를 대신해 실권을 휘두른다. 통 큰 씀씀이뿐이 아니라 그녀의 인척이 되는 민씨 일족들이 온갖 매관매직 등의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국고를 축냈다. 민비는 온갖 비행을 저지르는데 민씨 일족의 만행으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외세를 끌어들여 제압한다. 결국은 그 외세 세력인 일제의 하수인들로 구성된 낭인들에 의해 처참히 죽는다.

우리가 드라마나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본 민비의 일생은 새로이 창조되어 왜곡된 역사의 산물이다. 즉 인물의 단면만을 부각시킨 가짜 역사 드라마를 본 것이다. 그렇게 창조된 <명성황후>는 오늘날 우리에게 희대의 악녀가 희대의 희생양으로 묘사되어 우상화되어 있다.

당시 청·일 양국의 팽팽한 힘겨루기에 러시아가 개입하여 3국이 세력 다툼을 하였다. 1895년은 문제의 을미사변이 일어난 해이다. 일제를 끌어들여 동학농민혁명을 수습한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제를 견제하는데 일제로서는 두고 보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왕비 시해작전을 세우고 급기야 민비를 깊은 밤 구중궁궐에서 시해하기에 이른다. ‘여우사냥’이라는 이 작전은 일부 대한제국 군인의 협조를 받아 일본 낭인들이 저지른 만행이다.

세계 역사에서 볼 수 없는 조선 건국 이후 최대의 수모이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제는 1904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대한제국은 수많은 토지를 일제에 강탈당하는데 1905년에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발발하고 일제는 전쟁에서 승리한다.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고 미국과 가스라·테프트 밀약을 체결하고 11월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위협해 보호조약을 체결한다.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이완용 등 을사5적이 나라의 외교권을 일제에 넘기고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가 된다. 통관부가 설치되어 이토가 초대 통감이 된다. 당시 국왕인 고종은 집권 32년간 무엇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아관파천'이라는 역사의 기록을 남는다.

우리끼리 다투고 아무 것도 처리하지 못한 지도자들의 무능이 만들어낸 일이다. 정권유지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결과는 무참한 것이다. 1년 후 궁궐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지만 1910년 치욕적인 결과를 맞이하여 한일합병에 이른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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