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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않겠습니다] ⑤ 박우상 감독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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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않겠습니다] ⑤ 박우상 감독의 재발견
  • 안태근
  • 승인 2021.11.01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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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상 감독의 1985년작 '차이나타운(Los Angeles Streetfighter)'
▲ 박우상 감독의 1985년작 '차이나타운(Los Angeles Streetfighter)'

박우상(리차드 박) 감독이 올해 청주에서 개최된 제3회 충북국제무예액션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6편의 영화를 만들어 미국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그 말고도 엘리어트 홍(홍의봉)이나 신상옥, 김학경, 김효천, 이두용, 필립 리, 자니 윤, 심형래 감독 등이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6편이나 만든 이는 박우상 감독이 유일하다.

박우상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특이한 존재이다. 그동안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던 감독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태권영화를 만들었던 최영철, 김시현, 이혁수, 김정용, 남기남 등 모든 감독들이 그와 같이 국내 평론 한 줄이 아쉽다. 그것은 저예산 영화에 대한 괄시나 다름없다. 다른 장르라고 저예산이 아닐 터인데 유독 태권영화인들에 대한 괄시는 멸시에 가까웠다. 그것은 무국적, 고증 불문이라는 다시 태권영화의 제작 경향에서 유래하였기에 평론가들 탓만 할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의 활동 탓에 그에 대한 국내 기록은 더 드물다.

박우상 감독은 새로운 영화에 대한 집념으로 아메리카 드림을 이루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태권도 공인 4단 증이 있어 후배의 도장에서 도장 운영 노하우를 배워 자신의 도장을 오픈한다. 그것도 두 개 씩이나 운영하였는데 그것은 이소룡 영화의 후폭풍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스포츠카도 몰았다며 회고한다. 그러나 태권도장 오픈이 그의 아메리카 드림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고자 했다.

그는 1944년 생으로 1971년<맹인 대협객>으로 감독 데뷔했고 바비 킴 주연의<죽음의 승부>, <귀문의 왼발잽이>, <대적수> 등 많은 무예영화를 감독하고 1980년에 일시 귀국하여 미국 태권도의 대부 이준구(준 리) 주연의 <돌아온 용쟁호투>를 감독했다.

그는 재차 미국으로 건너 가 1984년 스페인 감독과 공동감독으로 <킬 더 닌자(KIll the Ninja/Kill the Dragon)>를 만들었다. 그리고 1985년 국내에서 <차이나타운>으로 개봉된 <닌자 터프(Ninja Turf/Los Angeles Streetfighter>, 1986년 <마이애미 커넥션(Miami Connection)>, 1991년 <나를 보라 아메리카(Look at Me America)>, 1993년 <차이나타운2>, 1997년 LA의 한국계 갱스터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KK 훼미리 리스트(K.K Family List)> 등을 감독한다. 그가 미국에서 만든 영화들은 국내에서 한국영화로 개봉되었지만 사실은 미국의 독립영화이다. 그와 함께 태권도 그랜마스터인 강대희와 바비 킴, 그리고 정준(준 청)과 그의 제자인 사이먼 리, 필립 리 등이 참여하여 만든 것이다.

그 멤버들과 함께 한 박우상 감독의 7번째 할리우드 영화는 2000년에 감독한 <제이슨 리>이다. 시카고의 전설적인 한국계 마피아 보스를 다룬 <제이슨 리>는 필리핀에서 로케이션 중 사고로 제작 중단되었다. 이미 70% 가량을 촬영한 상태이지만 영화란 이렇게 힘든 일이다. 더구나 외국에서의 촬영이란 해결 방법이 없을 수도 있다. 귀국한 그는 2003년 <형>, 2005년에는 <무등산 타잔, 박흥식>을 감독하였다. 그렇게 모두 스무 편을 감독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극장 상영용 프린트가 보통 만 자(feet) 가량인데 무려 필름 20만 자를 쓰며 촬영한 대작이다. 스크린을 통해 처음 본 박우상 감독은 뭉클해서 “이야기 하자면 길다...” 소감을 짧게 술회하였다. 필자와 영화제 기간 중에 GV 행사를 가졌던 1984년작 <차이나타운>은 할리우드에서는 독립영화로 촬영하였으나 오토바이 액션 등 볼거리가 많은 무예액션영화이다. 미국에서도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하여 할리우드 안착에 고무되었던 영화이기도 하다.

그의 미국에서의 성공적인 활동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었다. 물론 1973년 4월 정창화 감독이 홍콩영화인 <죽음의 다섯 손가락(Five Fingers Of Death)>의 북미지역 주말박스오피스 1위 기록이라는 경이적인 사례가 있지만 그 영화의 국적은 홍콩이었다. 그뒤 신상옥 감독이나 심형래 감독이 흥행 기록을 수립하였지만 역시 그 원조는 박우상 감독이다. 타국 시장에서 액션영화 장르 외 성공 사례는 드물다. 심형래 감독의 <디 워>가 SF 장르였을 뿐이다. 국내에서 태권영화가 소외받는 장르라는 것은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태권영화는 해외 시장 개척에 유효한 장르라는 것을 인식해 애정을 갖고 육성해야할 장르이다.

올해 충북국제무예액션영화제의 무예학술세미나에서 필자가 “태권도가 할리우드 영화에 미친 영향”을 발제하였고, 토론자로 나선 박우상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촬영하며 겪은 애환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저예산으로 한 대의 카메라로 촬영하고 후시녹음하던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활동하던 감독의 자화상이다. 여러 대의 멀티카메라와 동시녹음 시스템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코미디 같은 일이었다. 그가 겪은 일은 당시 누구라도 갔더라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다.

이제 한국영화는 세계 주류에 접어들었다. 한국영화 최전성기를 맞아한 것이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한국영화의 저력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박우상 감독 같은 분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3회 충북국제무예액션영화제에서 공로상은 바로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이다. 우리는 원로 영화인들의 노고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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