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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는 다큐멘터리PD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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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는 다큐멘터리PD다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2.15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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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큐멘터리PD다
▲ 나는 다큐멘터리PD다

다큐 제작에서 최고의 테크닉은 진실이다. 이소룡의 말에 의하면 "너의 고정관념을 비워라. 잔이 쓸모 있다는 건 비워져 있을 때이다."라는 말이 있다. 다큐멘터리는 상투적인 고정관념이나 주관적인 선입견, 편견을 버리고 제작되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다큐멘터리PD는 누구보다도 더 튼실한 마음가짐과 도전정신을 필요로 한다.

내가 다큐멘터리PD가 된 것은 영화계 입문 10년 후인 1991년의 일이다. 척박한 땅에 씨앗을 뿌리는 심정이었던 다큐멘터리감독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귀결일 수도 있다. 그것은 당시 스스로 제작자가 되어야 다큐멘터리영화 제작이 가능했던 탈출구로서 방송사를 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만든 첫 다큐멘터리가 <폭류>이고 단편으로 만든 <동춘>이나 <회심>도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들이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한국환상곡>, <한국의 춤 살풀이>, <살풀이춤>, <대한국인 안중근>을 만들고 EBS의 PD 제의가 들어와 방송에 대한 궁금증의 발로로 인해 성큼 발을 들였다.

그렇게 EBS 교양국 기획제작부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다. 그야말로 원 없이 만들게 되었는데 처음 만든 다큐멘터리가 40분 품으로 주 1회 방송된 <전통문화를 찾아서>라는 문화 다큐멘터리였다. 당대를 대표하는 장인들을 소개하며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였다. 문화다큐의 중요성이야 두 말할 나위없는데 제작비가 지원되고 제작 시스템이 받쳐주고 월급까지 주는데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기획하여 스스로 제작비를 조달하여 제작하여야 했던 영화계에서의 상황에서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제작 스케줄은 나와 파트너 PD 둘이서 번갈아 가며 격주로 한 편씩 만드는 과도한 업무량이었다. 몇 달 씩 걸려 한 편을 만들던 내게는 경이로운 작업이었다. “방송사에는 자료가 많다.”라는 S부장의 격려도 있었지만 자료는 자료일 뿐이다. 나는 쉼 없이 촬영을 하여 한 편을 만들었고 쉬는 날 없이 사전작업을 하며 선행 촬영을 하며 장기 제작 시스템을 도입했다. 2주에 한 편씩 방송해야 하는 시스템에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24년이 지나며 나는 방송인으로 정년퇴직을 했다. 그사이 만든 다큐멘터리가 <전통문화를 찾아서> 외에 <역사 속으로의 여행>, <EBS 스페셜>, <다큐 이사람>, <명의> 등의 정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그 외에 때만 되면 만드는 특집과 한·중수교 15주년 특집 다큐인 <청사초롱과 홍등>과 직접 기획안을 작성해 만든 <일제강점기의 영화>, <안중근 순국 백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 등 180여 편에 이른다.

그야말로 눈 뜨면 기획안을 생각하고 작가들의 원고를 다듬으며 촬영하고 편집실을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시간이 없어 이동 중인 차량 앞자리에 앉아 오늘 촬영할 내용을 궁리하고, 만날 인터뷰이(interviewee)와 통화를 하며 그렇게 24년을 보냈으니 얼마나 빨리 시간이 갔을까? 물론 다큐멘터리만 제작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정규 드라마와 특집 드라마, 보도, 생방송, 수능, 종합구성과 일반구성 프로그램, 하다못해 애니메이션까지 다양한 제작을 하였지만 기조는 다큐멘터리 제작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안 해본 장르가 없는데 사실이 그러하다.

다큐멘터리PD에게 다큐란 세상을 보는 방법이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영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다. 즉,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 선정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중에서 선정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내용의 다큐멘터리는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고 일반적으로 방송사에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는 문화며 역사, 건강에 대한 좀 더 원형적인 다큐들이다. 그래서 다작이 필요하고 나 역시 많이 만들게 되었다.

다큐멘터리PD가 되려면 사회 각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중 자신의 전문화 작업을 해야 한다. 한 가지의 전문가가 되다 보면 좋은 다큐를 만들 수 있고 평상시에도 글쓰기 등을 통해 자신을 담금질하여야 한다. PD라는 직업은 어차피 사람만나는 직업이다. 사람들을 만나 기획을 하고 취재를 하며 다큐멘터리는 숙성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동고동락하던 작가며 촬영감독, 스태프들과의 끈끈한 연을 잊을 수 없다. 전진환 작가는 나와 10여 년을 함께 하며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나도 퇴근을 안하여 별명이 ‘안퇴근’이 되었지만 전 작가는 아예 집에 안가고 밤 새워 다음날 촬영 구성안을 넘기고 아침에 퇴근했다. 그렇게 끈끈한 관계에서 일하니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청사초롱과 홍등> 촬영 때인 2007년은 중국에서 한 해를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50분 5부작을 만들었다. 일에 미친 사람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공동제작사인 중국 CCTV 관계자들에게 약속한 날짜에 중국 편성에 맞추어 30분 10부작을 완성해 건네니 그들도 놀라워했다. 그것은 국제적 신의 문제이니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되는 일이고 술 유혹, 담배 유혹을 이겨내며 좁은 편집실에서 나와의 전쟁을 하며 만들었다. 당시 내 곁을 지키며 말벗을 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은 후배 PD에게도 감사한다.

지금도 그러한 대작을 다시 제작하라고만 한다면 언제든 나설 용의가 있다. 아직은 다큐에 대한 열망이 뜨겁다. 내가 다큐멘터리PD인 것은 우연히는 아니고 47년 전 만든 첫 작품 <폭류>에서 이미 정해진 인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2010년에 초판 발행된 『나는 다큐멘터리PD다』는 나의 다큐 인생과 다큐멘터리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 안태근 박사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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