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5 15:59 (목)
[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배우 라이프 스토리 ⑱
상태바
[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배우 라이프 스토리 ⑱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6.16 06: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5년 박호태 감독의 '미스 김'에서 원미경과 신일룡
▲ 1985년 박호태 감독의 '미스 김'에서 원미경과 신일룡

신 배우가 예식장 사업을 시작한 1985년의 개봉작은 박호태 감독의 <미스 김>이라는 영화 한 편뿐이다. 그로서는 서서히 은퇴 준비를 한 것 같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에서 함께 했던 원미경 배우와 공연했다. 이 영화는 1970년대를 풍미했던 호스테스 장르로 다소 철지난 영화였다. 원미경의 이미지와도 맞지 않고 범작으로 평가된다. 신일룡 배우도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평이작이었다.

1986년에도 그의 출연작은 단 한 편이었다. 동아수출공사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이다. 배 감독으로서는 그의 인생 대표작을 만들 요량으로 일본에서 미첼 동시녹음 촬영기를 빌려와 신 배우와 다시 호흡을 맞추었다. 그가 맡은 배역은 황진이가 진정으로 짝사랑했던 벽계수 역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형적인 역할에서 기대할 연기는 별로 없다. 영화의 흥행결과는 투입된 예산과 역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동 시기에 만들어져 개봉된 이두용 감독의 <내시>와의 경쟁에서도 참패한다. 영화는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는 말을 입증했다.

영화를 천직으로 알고 시작한 배우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그가 한국영화계에 남긴 족적은 남다르다. 신상옥 감독이라는 거장을 만나 영화연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여러 유명 감독과 함께 하며 그의 숨어있는 재능이 발굴되었다. 특히 액션배우로서의 탁월한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남모를 고생을 바탕으로 배우로서 타고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1986년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에서 장미희와 신일룡
▲ 1986년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에서 장미희와 신일룡

그의 홍콩 및 인도네시아에서의 활동은 모두의 관심을 받았고 그의 위상은 다른 배우들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그의 외국 활동 이후 많은 배우들이 해외 진출을 하였고 유명세를 탔다. 그는 국내 활동에 주력해 한국영화사에 남을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그의 필모그래피를 풍부하게 하였다. 그의 출연작은 흥행 신기록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영화 베스트에 오르는 여러 우수작에 출연했다. 그의 이름은 졸저 『한국영화100년사』, 『한국합작영화100년사』, 『한중일영화100년사』에 많은 기록을 남겼다.

배우는 좋은 매니지먼트사를 만나야 한다. 작품을 고르고 배우를 알리는 일은 배우로서 성장하는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의 활동시기에는 그러한 대형회사들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전히 개인의 감으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했다. 그런 시기에 배우로서 자리를 잡고 대중적으로 알려진다. 그것은 그가 성실하고 꾸준히 배우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활동 중에 해외로까지 진출하는 도전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꾸준히 좋은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재능을 다채롭게 보여주었다.

한국영화100년사를 통해 수많은 배우가 하늘의 별이 되었고 또 잊혀 갔다. 과거의 스타들 중 기억되는 이는 극히 일부이다. 일제강점기 춘사 나운규, 상해로 가서 활동했던 정기탁, 그 몇몇의 배우들조차도 일반인 관객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제 신일룡도 자신의 말마따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30년이 지나니 똑같은 처지이다. 연예인의 속성이 그러하다. 그래서 기록은 중요하다. 『신일룡 평전』을 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잊힌 배우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