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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승현이 형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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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승현이 형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8.0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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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세공장에서 승현 형.
▲ 금 세공장에서 승현 형.

김승현 형과는 고종사촌형제이지만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이 지냈다. 나와는 다섯 살 차이인데 어릴 때부터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친 형제라고 해도 집안 행사 때나 만나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런데 형은 미국에서 한국을 워낙 자주 와 우리 고모님 표현에 따르면 돈 벌어 허공에 다 뿌린다고 할 정도였다. 형이 귀국 때마다 매일같이 만났으니 국내에 사는 누구보다도 많이 만나는 형제였다.

형은 1950년 2월 29일 생이다. 2월이 원래 28일밖에 없는데 어떻게 잘못 출생 신고되어 공항에서 여러 번 문제가 있기도 했다. 결국 어느 해 귀국해 출생지인 창신동의 주민센터를 찾아가 날짜를 28일로 바꾸었다. 형이 아기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고생이 심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은 고모님이 더 고생했을 것이지만 아기 역시도 난리를 겪었으니 드는 생각이다.

그 시기라면 겪어보지 않은 내 또래 사람들도 하도 많이 들어서 고난의 시간들을 잘 알고 있다. 이종사촌인 이근후 형도 같은 범띠 생인데 호리호리하다. 집안 특성일 수도 있지만 승현형은 키가 작은 편이다. 그 시절 잘 못 먹고 자란 것은 틀림없다. 한국전쟁은 예상과 달리 무려 3년간을 끌었던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벌어져 8월 15일 이전까지 한반도를 적화하려던 계획이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공군이 참전하며 국제전으로 비화하여 그렇게 길어진 것이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린 적이 허다했다고 들었다. 전쟁은 군인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악몽 같은 시기일 것이다. 죽음보다 더한 것이 굶주림의 공포이다.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텨냈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도 그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지원해주는 밀가루와 분유가루를 배급받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들은 이 무슨 소설 같은 이야기냐고 하겠지만 사실이 그렇고 우리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헐벗고 배고픈 시절의 이야기는 이제 잊힌 이야기이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형은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형보다 세 살 빨랐던 고 신일룡 배우가 어린 시절에 슈샤인 보이를 하고 신문배달을 하였다는데 형 시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형은 일찍이 금은방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금 가공 시에 나오는 금가루들은 정말 금같이 귀한 것이다. 공장을 청소하며 어깨너머로 가공 기술을 배워나갔다. 그래서 비교적 일찍 돈을 벌었던 형이다. 집의 책상 서랍에 받은 돈을 모았다는 형이다.

형은 근면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성격으로 남보다 빨리 기술자가 됐다. 형의 가공기술은 남들도 놀랬다. 나도 기억나는 것은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 기념으로 태권도협회 뱃지를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형이 사진만 보고는 똑같이 만들어 주었다. 나는 형의 기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형의 비즈니스 상술도 배워 내가 침대를 산다고 할 때 같이 가서 가격 협상을 하는 것을 보고 형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형은 일찍이 명동에 진출하여 금 공장에서 일했다. 친구들과의 동업이었을 것인데 뒷 골목에 공장을 차려 친구들과 같이 금 가공을 했다. 그때 형을 만난다고 명동을 들락거렸다. 형의 수입은 좋았고 행색도 영화배우 같았다. 생긴 것도 최무룡 배우 스타일이라서 멋졌다. 여성들이 먼저 따라올 것 같은 멋쟁이였다. 형은 내게 우상같은 존재가 됐다.

어느 날 형과의 연락이 끊겼다. 1979년에 도미하며 내 앞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미국의 누나가 초청하자 내게 연락 없이 미국으로 가버렸다. 나 역시도 학업에 열중하던 때이라 몇 달을 못 만나고 고모를 통해 “미국 갔다.”라는 말을 들었다. 내게 이야기하면 나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화가 날 지경이었다. 당시 미국은 젊은이들에게 꿈의 나라였다. 그래서 학교를 마치지도 않고 훌쩍 떠나 불법체류자가 되어 주저앉은 이들이 많았을 때이다.

형의 소식을 간헐적으로 건네 들으며 시간이 흘러 10여 년이 흘렀다. 그리고 형이 우리 앞에 미국 부자가 되어 나타났다. 그 십 년 동안 나도 사회생활에 자리 잡느라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는데 영화에서처럼 불쑥 우리 앞에 등장한 것이다. 우리라면 사촌동생 형제들을 포함해서이다. 형 밑으로도 동생들은 많지만 나이 차가 적었던 동생들이 참석했다. 형은 예의 그 멋진 미소를 머금고 “잘들 지냈어?”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연락 없이 혼자만 미국 가서 미안하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날 회포를 푸느라고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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