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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승현이 형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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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승현이 형 ②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8.0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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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의 신혼여행
▲ 1986년의 신혼여행

승현 형과 10년 만에 만나 기쁨이야 두 말할 나위없었다. 형은 미국에서 성공하여 장가도 갔고 아들도 하나 있었다. 이름이 해룡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 이후로 귀국 때마다 계속 만났고 그 동안의 일들을 들었다. 형은 달라스 교외에 살았는데 골프장 옆집이라고 했다. 이침이며 산책을 하고 그야말로 꿈에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생활이었다. 당시 내 직업은 EBS PD였다. 그러함에도 부러웠던 형이다.

형은 누나의 초청으로 1979년에 미국에 가서 갖고 있는 기술을 인정받아 금 가공회사에 취직을 했다. 남들이 한 개 만들 동안에 세 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인의 손재주를 보여주자 놀라 특급대우를 해주고 언어학교에도 보내주었다고 한다. 형은 유‧엔‧티(University of North Texas)에서 영어를 공부하며 주말이면 사냥과 낚시도 다니며 즐거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민자로서 꿈에 그리던 생활을 만끽했을 것이다. 이야기만 들어도 신나는 일들을 직접 겪은 것이다. 그것도 최고의 보수를 받으면서이니 즐거운 나날이었다.

형은 회사의 사장 아들이 세운 회사로 스카우트 되어 2년을 더 다니고 프리마켓에서 누나와 함께 자신의 장사를 시작했다. 거칠 것 없는 오누이 콤비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경기가 좋아 수입도 좋았다. 그들 남매는 2년간 가게도 차려 함께 하였고, 형이 결혼 후에 누나가 따로 가게를 차리며 각자 독립했다.

누나가 기술이 없어 기술자를 고용한데 비해 형은 고급 기술자이므로 수입은 열 배 이상으로 차이가 났다고 누나는 말했다. 형은 가게를 다섯 개로 늘리며 영업 수완을 발휘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 온 유학생들을 알바생으로 채용했다. 그들과 한국이야기도 하며 일석이조였다. 그들은 학위를 따고 귀국하여 대학의 교수도 되고 사업가로도 자리 잡았다. 형이 귀국할 때면 그들과도 만나 함께 자리를 만들었다. 대전의 목원대 김병윤 교수도 그들 중 한 명이다.

형의 배우자 김경민은 서울 출신의 규수로 1976년에 온 가족이 미국 이민 온 가정의 2남 2녀 중 차녀였다. 두 사람은 다소 과년한 나이인 36세와 32세에 만나 벼락같이 가까워져 두 달 교제 후 결혼식을 올렸다. 1986년 3월 8일이다.

두 사람은 그전에도 만날 인연이었다. 형수 역시도 금은방을 루이지애나에서 하고 있을 때이다. 금 도매상 주인이 두 사람을 각기 알기에, 좋은 커플이 되겠다 싶어서 3년 전부터 소개하려했으나 형수가 거절했던 사연이 있었다. 거절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인연이 안 닿았고 이후 만나 급속도로 가까워져 결혼에까지 골인한 것이다.

그들 부부는 캐론톤의 단독주택을 마련해 2년 간 살다가 1988년 11월 28일 아들 해룡을 낳는다. 1989년 3월에 던컨빌 골프장 옆집을 60만 불에 사서 이사하고 17년간을 살았다. 형으로서는 꿈과 같은 세월이었다. 한국을 수시로 드나들며 사업에서도 최고였던 시절이다. 한국에서도 명사가 가면 형의 집에서 묵었다고 한다.

형은 교회에도 열심히 나갔고 선교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내가 아는 형에서 훨씬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형의 골프 실력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고, 각종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미국한인야구협회 부회장, 체육협회 회장, 한글학교 이사장, 골프협회 회장, 미주상공인연합회 달라스 지회장, 코리안‧아메리칸 데이(한미후속 세대의 날) 대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동안 받은 임명패, 감사패, 트로피들이 가득한데 그렇게 공익활동으로 쓴 비용만도 엄청날 것이다.

달라스 상공회 회장 시절에 회원들과 함께 귀국하여 국내 지자체장들과 회의나 행사 때에는 나도 함께 했다. 그 시기의 젊은이들은 꿈이 많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현시켜 나갔는데 승현 형도 대표적인 케이스 중의 한 명이다. 미국에서 자신의 야망을 펼치고 한국에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던 대표적인 일이다.

중국의 조선족들에 대한 관심도 많아 중국 연변대에 후원을 했다. 연변대 방문 시에는 총장과 면담 후 학교가 내어준 차를 타고 백두산 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다. 최고의 귀빈 대우를 받는 자리에 나도 동석했었다. 당시 에피소드라면 도로공사로 백두산 가기에 바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점심을 먹자며 거한 식사자리가 펼쳐졌다.

백주의 맛에 취해 시간을 보내다가 급히 백두산길을 떠났지만 비행기 시간을 맞추질 못할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하고 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항공기가 정시에 출발했다. 도착하니 지방 영도가 나와서 다음 비행기로 바꾸어 놓았다며 융숭한 대접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사전에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형의 사업은 중국으로 확장되는 듯 보였지만 후배들의 중국 사업담을 듣고는 포기해버렸다. 강OO 사장은 중국 시장에 진출해 귀금속 사업을 하려했지만 성과가 없이 빈손으로 귀국했다. 형의 사업은 세계 경제 위기 등 몇 번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현상 유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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