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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승현이 형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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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승현이 형 ④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8.0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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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선교활동을 갔다.
▲ 201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선교활동을 갔다.

형에게 미안했던 일도 있었다. 내가 저지른 건 아니고 나의 선배 중 최OO탤런트와 합석하여 술을 마시고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미국 부자라고 심한 거 아니야...” 뭣 때문인지 빈정이 상한 최의 말에 형은 두말 않고 먼저 가버렸다. 형은 물론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는 않았다.

형의 주량은 아주 센 편인데 귀국하면 매일같이 나 아니면 친구들을 만나거나 하면서 술자리를 갖게 되는데 가히 초인적인 주량이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받아 왔을 때 몸살 끼가 있어서 안 마신 것 빼고는 '두주불사'였다. 그렇다고 취한 행동을 보인 적은 없다. 주로 드는 음식은 막걸리와 더불어 순대국, 회, 찌개류이다. 미국에서도 먹겠지만 소박한 한국음식을 즐겼다. 젊어 먹었던 음식이 가장 맛있는 법이다.

귀국하면 매일같이 골프 일정을 잡는데 골프를 무척이나 즐겼다. 이용료가 싼 미국에서나 하지 왜 한국까지 와서 저러나 할 정도인데 골프를 그만큼 좋아했던 것이다. 물론 친구가 그리워서 그랬을 것이다. 골프 스코어는 마지막 성적이 76타였다고 형수가 스코아 카드가 있다며 성적을 불러주었다. 형은 장타가 특기로 트로피도 많았다.

형은 턴컨빌의 집을 팔고 2006년에 다시 캐롤톤으로 이사 갔다. 서너 개 운영하던 가게를 하나만 하며 가까운 곳으로 옮긴 것이다. 50평 규모의 매장에 투 밀리언 달라(약 25억 원) 정도의 물건들이 소장하고 있다. 큰 가게이므로 이 정도의 물건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 예전에 한창 크게 하던 때에 비하면 적은 물량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게 무엇을 선물하지는 않았으니 다음 기회에 하다가 시기를 놓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형은 코로나19 유행 전에 귀국하고는 전화연락만을 취하고 통 귀국을 하지 못했다. 서울에 마련한 역삼동의 부동산도 궁금하였을 터이다. 그런데 코로나로 격리 기간이 있어서 길게 자리를 비울 수 없었는데 얼마나 답답하였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전화를 걸어 국내 상황을 듣고는 “그럼 다음에...”하고는 했다.

그러던 2022년 2월 11일,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오후 1시에 별세하였다는 것이다. 청천벽력도 유분수이지 건강하고 젊은(?) 나이에 무슨 일인가. 실제로 72세이니 100세 인생 시대에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있다. 척추에 통증이 심해져 미국 병원에 가서 디스크 수술을 받았던 것인데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코로나 팬데믹 전인 2019년 3월, 형은 남아공으로 선교활동을 다녀왔다. 그리고 건강하게 운동도 하며 지내다가 허리 통증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수술을 권유하는 의사의 권고를 따랐다가 이런 변을 당한 것이다. 수술 집도의는 이런 수술은 수도 없이 많이 했다지만 환자는 깨어나지 않은 것이다. 의료사고임이 분명한데 밝혀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유가족들은 망연자실해있고 결국 다니던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루고 그렇게 이승을 떠났다. 코로나만 아니더라면 한국에서 수술하였을 것이고, 아무런 문제 없이 퇴원하여 정상생활을 했을 터인데 이 무슨 변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젊어 이민을 가서 열심히 살며 성공적인 이민자가 되었던 형의 최후로는 믿기지 않았다.

형수의 말을 빌면 형은 일만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굉장히 성실한 남편으로 매사에 솔직했고 착한 남편이었다고 술회한다. 유산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남겼다. 무일푼으로 이민 와서 기적적인 일이다. 얼마 전 아들 해룡이 장가가서 아들까지 낳았다. 인생은 윤회하는 것인가? 형의 별세 후 태어난 아기가 제 할아버지를 닮았다니 절로 드는 생각이다.

형의 활동 기사는 여러 신문에도 실렸다. 코로나 이전에 해외 선교활동을 가서 한인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형은 자신의 발자취를 분명하게 남겼다. 이민자로 성공 가능성은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볼 때 형은 1%안에 들 것이다. 형은 사회 공적 면에서나 비즈니스 면에서나 뛰어난 이민자 중에 한 명으로 기록될 인물이다. 유가족은 형의 뜻을 이어받아 국내의 가족들과의 유대도 이어나가고 미국에서도 꿋꿋한 한국계로서 활동을 기대한다.

형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장편이 되었다. 그만큼 이야기 거리가 많고 내 젊은 날을 함께 했던 형이기에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얼마 전 별세한 신일룡 형과 흡사한 점도 많다. 개척자적인 면모와 비즈니스, 또 운동을 좋아한 것, 외모는 다르지만 미남이었다는 점들이 닮았다. 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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