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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유학생이 본 승현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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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유학생이 본 승현이 형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8.0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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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초창기, 누나의 아파트에서 승현 형.
▲ 이민 초창기, 누나의 아파트에서 승현 형.

김승현 형과 미국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김병윤 전 목원대 교수와 인터뷰를 하였다. 그에게서 이민 초창기 이야기와사업 종잣돈 마련 등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형이 유학생 병윤과 만난 것은 1982년인데 덴튼(Denton : 달라스 북쪽 대학도시)의 유‧엔‧티(University of North Texas) 어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하던 때이다.

유‧엔‧티 학부생이었던 빅터 정에게서 룸메이트였던 병윤을 처음 소개받았다. 병윤은 경영대학원 석사공부를 위해 이곳에 와있었다. 해외에서 동포를 만나게 되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 형은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하기도 하며 친하게 되자 주말이면 프리마켓에 나가 함께 귀금속 장사를 하며 형제 이상으로 친해졌다.

프리마켓에서는 빈 점포를 빌려 세금 없이 장소 사용료만 내고 장사를 하였는데 하루에 몇 백만 원씩 팔았다고 한다. 당시에도 무장강도가 있어서 총기를 소지하고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장사가 잘되니 즐거웠던 때이다. 프리마켓에서의 주말장사는 결혼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만큼 장사가 잘되었기 때문이다. 형은 메인 점포를 달라스에 두고 여러 곳에 가게 세팅(일종의 프랜차이즈)을 해주고 물건들을 공급해주었다. 형은 이러한 영업을 바탕으로 이민 초기에 빨리 자리 잡게 된다.

형은 따뜻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분으로 열 살 정도가 나는 이민 2세 학생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들과 잘 융화하면서 배려를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당시 덴튼의 아파트에서 살 때인데 때로는 한 시간 거리인 달라스의 한인 가게에서 쇼핑을 해서, 한식 상차림을 하여 함께 즐거운 자리를 했다. 형은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음식 만들기를 즐겼다. 상차림이라야 찌개, 국 등이었는데 독신생활에 필요한 필수 요리였다.

형처럼 성실하고 착한 사람은 어디서 살든 문제가 없었다. 이민 초창기부터 유학생들이나 이민 2세 재학생들과 어울리며 빠르게 이민생활에 잘 적응해나갔다. 한국에서부터 노래도 팝송 위주로 부르던 형은 영어 실력도 늘어 생활에 불편함이 없었다. 심지어 교환교수로 왔던 어느 분의 통역을 맡기도 하였다. 준비된 이민자는 아니었지만 빠른 적응력으로 정착했던 형이다. 숙련된 귀금속 가공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정착에 큰 힘이 되었다.

형의 생활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차츰 안정되자 당시 미국인들의 로망인 토요타 수프라 스포츠카를 구입해 드라이브를 즐겼다. 속도위반 과태료를 내지 않아 고속도로 상에서 불심검문을 받는 해프닝도 있었다.

유학생 병윤은 3년간 유학생활을 마치고 석사학위를 취득 후 귀국한다. 그동안 나눈 정 때문에 형은 공항까지 배웅을 나갔다. 병윤은 귀국하여 박사 코스를 밟으러 재차 도미 준비를 하던 참에 우연찮게 목원대 교수 발령을 받는다. 그래서 박사 공부는 한국에서 하게 되었다.

병윤은 교수가 되어서도 형과의 인연을 이어나갔다. 형이 귀국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전화하여 안부를 챙기고 대전 서울을 오가며 만났다. 김 교수는 나의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와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 등에서도 감사와 이사를 맡아 활동해주고 있다. 형과의 인연이지만 지금도 변치 않고 함께 활동하는 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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