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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종로 시대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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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종로 시대 ③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8.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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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종로 2가의 풍경.
▲ 1970년대 종로 2가의 풍경.

군대 가기 전까지 우리는 종로를 떠날 수 없었다. 그즈음 통기타 문화가 시작됐는데 당시 내 주변의 다섯 명 중 한 명은 기타를 쳤다. 유행처럼 통기타 업소도 여기저기 생겨났다. 우린 맥주 한 조끼를 놓고 노래에 취해 라이브 무대의 통기타 연주가의 노래를 들었다.

서유석 가수의 “슬기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지 마세요”로 시작되는 <정말 싫어요>, 그리고 김정호의 노래 <하얀 나비>, 어니언스의 <편지>, 이장희의 <한 잔의 추억>, 사월과 오월의 노래까지 그들의 노래를 종로의 야간업소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 무대에 서는 가수들은 간혹 오리지널 가수 일 때도 있었지만 짝퉁 가수가 더 많았었다.

영화 <별들의 고향>이 개봉된 것도 그때이다. 그 때까지의 흥행기록을 깼는데 나는 최인호 원작소설을 먼저 읽었기에 흥행의 가능성을 미리 점쳤었다. 당시로는 잘 만든 영화임에 틀림없는데 아마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영향이 없잖아 있었을 것이다. 영화란 동시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년문화라는 말이 시작됐다. 청바지에 기타, 테니스 라켓이라도 들고 담배 한 대 뽑아 물면 그건 당시 틀림없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최인호 작가가 그걸 놓칠 리 없다. <병자와 영태>란 소설을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는데 나도 눈 뜨면 열심히 읽었다. 그것을 영화화 한 사람이 하길종 감독인데 <바보들의 행진>이 그 영화이다. 흥행에 성공했음은 두말 할 나위없다.

한수산 작가의 <밤의 찬가>는 청춘의 아픔과 극복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김호선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는데 원미경, 김추련 배우가 출연했다. 흥행은 별로였고 뒤에 나온 장미희 배우의 <겨울여자>가 흥행기록을 경신했다.

새로운 성 모럴을 제시했다는데 선전문구의 ‘성처녀’는 선정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카피였다. 당시 소설이나 영화는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며 성문화 개방에 일조했거나 그 영향을 받은 산물일 것이다. 폐쇄적이던 사회 구조 속에서 개방된 신 도덕주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호선 감독이 유현목 감독의 조감독을 거친 국내파라면 하길종 감독은 해외파이다.

하길종 감독은 미국 UCLA, 즉 남가주주립대에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같이 공부하고 귀국했는데 <화분>이라는 이효석 원작을 영화화해 데뷔했다. 푸른 집으로 상징된 권력을 향한 절규가 인상적인 영화였다. 하 감독은 이 영화로 문제적 감독으로 낙인찍혀 별세 전까지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그 당시 그는 우리의 우상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피에로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영향을 받은 영화라는 것을 알았다. 당시의 영화적 실험은 충만했고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예술 행위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1975년, 하길종 감독이 만든 <바보들의 행진>에는 당시 대학생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고, 송창식이 부른 주제가는 젊은이들의 절망과 희망을 노래해 가슴에 와 닿았다.

당시에는 다방문화라고 할 만큼 다방에 즐겨갔는데 커피, 홍차 모두 50원을 받았다. 가끔 “위스키 더블 한 잔”을 외치기도 했는데 레지는 싱글 생글 웃으며 “오빠!!”를 연발했다. 그 때 진풍경이 DJ 박스안의 DJ인데 장발족 단속을 피해 멋지게 기른 장발을 (혹시 가발일 수도 있다.) 뒤로 넘기며 신청곡을 틀어주었다. 물론 혀를 굴리며 팝송 제목을 읽는데 인기 만점이었다.

가끔은 다방으로 온 전화를 안내해 주기도 했는데 이런 식이다. “실내에 혹시 자신의 별명이 우량아인 분, 카운터에 전화 와있습니다.”하면 다방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뚱뚱한 내 친구에게로 모아지며 웃기 시작한다. 친구는 사람들이 더 웃기 전에 뛰어가 받지만 전화는 끊어진다. 이는 물론 한쪽 전화 부스에서 녀석을 골탕 먹이려는 친구의 소행이다.

이렇듯 보통학생들의 장난과 낭만이 흘러넘쳤던 곳이 다방이었는데 멋쟁이 여대생들은 아늑하고 오붓이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신촌의 카페를 찾았다. 이 시절 DJ 하면 고영수 씨가 떠오른다. 어정쩡한 학생, 어벙한 젊은이의 이미지인 그도 영화에 출연하는데 이만희 감독의 <태양 닮은 소녀>에서 나온다.

1974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이만희 감독이 별세 전 해에 만든 영화인데 영화음악을 신중현이 맡았고 그의 금지곡 <미인>이 주제가처럼 반복해 나온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가사가 권력층의 마음에 안 든다는 건데 도둑이 제 발 저린 셈이다. 멀쩡한 노래가 시대를 잘 못 만나 몇 년간 사장되고 결국 빛 보지 못했다.

속앓이는 신중현 씨가 했는데 돌아가신 분은 이만희 감독이다. 이만희 감독의 술 스토리는 “영화를 안주로 술을 마신다”라는 백결 작가의 말처럼 대단했던 것 같다. <7인의 여포로>라는 영화로 반공법에 걸렸을 때 수사관에게 “이 영화를 김일성이한테 보여 봐, 좋아하나?” 하며 대들다가 엄청 맞았다는데 그 때 후유증일까?

그러나 어디 그 분 뿐 일까? 술이라고는 농촌 모내기 갔다가 막걸리 먹어본 게 전부인 학생들이 소주를 그렇게 물처럼 마시게 했던 시대이다. 아, 그 때 소주는 30도였다. 지독한 시대가 지독한 술을 만들어 그렇게 먹였나 보다.

당시 대학가에선 데모가 실종됐다.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는데 1974년 이후로 집회와 시위에 대한 ‘집시법’이라는 게 생겨 몇 사람 모여 수군거리기만 해도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몰려왔던 때이다. 캠퍼스에 깔린 책장사를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책을 구입하여 읽는 학생들도 많았다.

이만희 감독은 당시 그런 모습의 대학생들을 통해 고발이라도 하려 했을까? 힘없는 대학생들은 웃기는 부류였고 여대생은 돈 벌러 모델을 한다는 내용의 <태양 닮은 소녀>. 영화의 여주인공은 이만희 감독의 마지막 페르소나인 문숙이다. 약 먹은 여자 옥화를 비롯하여, 그녀는 그 시대를 리얼하게 연기한 비련의 여인이다. 이만희 감독의 유작인 <삼포 가는 길>에도 출연하는 문숙은 지금도 활동을 한다.

국시로 한 시대에 독재의 그늘은 너무도 무거웠다. 우리는 그냥 답답해했다. 더워도 답답했고 추워도 답답했다. 차라리 질식할 것 같다고나 할까? 평화로운 캠퍼스가 답답해 종로의 피닉스다방에서 귤다방으로 때로는 종로서적에서 공짜 책을 보며 극장을 순례하며 그렇게 종로시대를 마감한다. 군 전역을 하고 찾아간 곳도 종로다. 복교하기 전까지 외국어 학원을 다녔는데 쯔야코 선생님의 일본어 강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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