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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명동 시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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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명동 시대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8.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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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워크숍 영화 '적상춘(赤想春)'
▲ 1976년 워크숍 영화 '적상춘(赤想春)'

명동은 한국에서 땅 값이 가장 비싼 곳이다. 그리고 인구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이 명동이 코로나의 일격에 사람들의 발 길이 끊기고 스산해진 요즈음이다. 이 곳은 내 젊은 시절에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렜던 곳이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종로가 친한 친구라면 명동은 애인이라고 비유하면 어떨까. 그것도 콧대 높고 도도한 애인이다.

고등학교 때 나가 본 후 졸업하기만을 기다렸던 것도 그곳이 문화의 공간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이야 금융 및 상업지구로 자리 잡았지만 예전에는 그곳에 국립극장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고 김순철 배우가 출연한 <맹진사댁 경사>를 보았는데 대형무대가 주는 연극의 진수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국립극장은 증권거래소로 바뀌었다가 다시 극장으로 복구되었다.

그리고 대학 때에는 교수님이 연출하고 선배들이 출연한 <환타스틱> 등을 보았는데 어찌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얼마 전 만해도 소극장이 있어 공연을 관람했지만 이제는 공연장도 모두 대학로로 이전을 하여 삭막해졌다. 명동에는 당연히도 명동극장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몇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지금은 멀티플렉스 극장이 되었다.

그리고 중앙극장에서도 많은 영화를 보았는데 구형극장의 표본 같았던 구식스러움이 기억 난다. 지금은 물론 극장도 사리지고 고층빌딩이 들어섰다. 명동하면 영화인들이 충무로로 자리 잡기 전에 모였던 곳이며, 기타 문인 및 예술인들이 모여 풍류를 논하던 곳이었다. 당시 영화인들은 인접한 충무로로 자리를 옮겼을 것이고 명동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모여 살며 개발되어 꽤 비싼 지역으로 일찍이 발전했다.

진고개라는 작은 언덕을 기준으로 일본인 마을과 경계가 되어 예전의 명동은 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광복을 맞으며 그야말로 해방공간이 되어 문화인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명동문화를 만들어 갔다. 김수영 시인, 이중섭 화가 등의 에피소드가 EBS드라마 <명동백작>에서 소개되었다. 예술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곳이 바로 명동일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 일본인들이 모이는 이유가 그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착잡한 이야기인데 외화벌이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그럼 내가 명동을 제 집 드나들던 것처럼 다녔을 때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지금의 명동역에서 명동성당 가는 길 양 옆으로 찌개집으로 불리는 소주집이 즐비했다. 지금은 각종 가게들이 늘어서고 식당들은 뒷골목으로 이전하였는데 당시는 앞 점포들이 모두 술집이었다. 그곳을 들어서면 무대에 서는 배우의 심정이었다. 지금부터 시작될 연극의 주제며 대사가 절로 만들어졌다.

지금의 화두도 새롭겠지만 당시의 화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고 더 다양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좀 더하면 당시 맥주집도 있었는데 뽀빠이 이상용이 야설을 늘어놓던 대중맥주홀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학생들이 가기엔 비싸 자주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 조끼(머그형 맥주잔)를 시켜 놓고 시간만 보냈다. 그리고 라이브 무대가 활성화된 것은 청년문화로 기타를 치는 싱어송라이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독도는 우리 땅>을 발표한 정광태, <시골길>의 임성훈, <나그네 길>의 전영록도 명동의 작은 라이브 무대에 섰다. 그리고 임성훈 가수의 가방을 들고 다니며 <시골길>을 작사, 작곡했던 오준영은 초등학교 동창인데 훗날 영화음악가가 되어 송영수 감독의 <창 밖에 잠수교가 보인다>라는 영화에서 그럴듯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무명신인을 선발하는 무대도 성행했는데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쎄시봉을 비롯하여 여러 음악홀이 있었다. 명동의 작은 음악홀 '르시랑스' 무대를 통해 신인가수를 선발 했는데 중학 동창 김현규, 대학동기 김혜옥 등도 그런 무대를 통해 데뷔했다. 이런 무대는 명동 말고도 무교동, 종로에도 생겨났다. 바야흐로 청년문화가 선풍을 끌며 학생들의 스트레스 탈출구가 되었다.

신중현은 <미인> 이후 출연 금지를 당해 활동을 못했지만 서유석 가수가 부른 <타박네>, 이장희 가수의 <그건 너>, <한잔의 추억>, 송창식 가수의 <왜 불러>, 이종용 가수의 <너>, 김정호 가수의 <이름 모를 소녀> 등 이른바 통기타 가요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이들은 당시 남진, 나훈아, 송대관 등 트로트 가수들과 대척점에 있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오히려 유행을 선도해나갔다.

교련을 받으며 교련복을 입고 강의실을 드나들며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도끼만행사건'을 의무적으로 봐야 했던 시대에 종로나 명동은 하나의 숨통으로 탈출구였다. 데모가 절대 금지된 상아탑에서는 비유와 풍자, 저항과 은유의 심한 사회 자폐증으로 이상 기류를 형성하며 바보문화, 청년문화를 창출했다.

종로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문화의 주류는 청년들이었다. 침묵을 하고 있지만 터질대로 곪아터진 심정을 이런 식으로 표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명동에서 보낸 시간들은 세속을 떠나 삶의 활력소를 얻는 곳이었다고 생각한다. 술을 한 잔 마셔도 달랐고 영화, 연극을 봐도 달랐다.

그래서 길지 않은 그 길을 걷고 또 걸었는데 그게 낭만이라면 낭만이었을 것이다. 멋쟁이가 모였던 명동은 특별했다. 커피숍 '코스모폴리탄'에서 차를 한잔 하고 앉아있으면 내가 그 시대의 대가들과 대화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클래식 음악다방에서 듣는 고전은 절로 감동이었다.

종로도 좋아서 즐겨 나갔지만 역시 멋이 있는 명동은 우리시대 최고의 장소라 할 수 있다. 1977년쯤일까? 명동 길 건너의 퍼시픽 호텔에서 남진 가수가 하루 100만원 씩 받고 출연했던 일이 기억나는데 그 앞에서 가게를 하던 민선 누나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이 그 즈음이다. 그 누나 따라서 승현 형도 이민을 가는데 그 후 특별히 명동엘 나갈 일이 줄었다.

이 때 쯤 다소 틀이 갖춰진 내 영화를 만들었는데 <적상춘>이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학생영화가 즐겨 한문 제목을 붙였는데 “어느 봄날 붉은 상상의 나래”라는 뜻이다. 공원에서 쓰레기 치우는 청소부를 보며 현실과 과거를 넘나드는 '상상유희'를 한다는 내용인데 영상으로 주제를 전달한다는 영화의 기본을 다시 생각하며 찍었다. 건대 축산과를 졸업하고 3학년에 편입한 김항원 선배가 촬영을 하고 복학생인 김영준, 이한상, 조성훈 선배들이 연출부였는데 주인공은 동기인 정태원과 김혜옥이었다.

이중거 교수는 현장까지 나오셔서 연출에 조언을 해주셨는데 촬영 후 신설동 복집을 거쳐 명동까지 나와 맥주를 마시며 끝없는 영화이야기를 펼쳤다. 이중거 교수는 이탈리아에서 영화유학을 마치신 분으로 열정이 대단하셨다.

정태원이 연출한 <난파선Ⅱ>는 양평의 국수도로 가서 촬영하였는데 자살 직전의 여인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벌이는 치열한 활극물이다. 나는 주인공을 맡아 정말 열연을 했는데 지켜본 선배가 “너 완전히 돈 것 같더라”며 웃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여주인공 역은 쉽게 엄두가 안 나는 역할인데 결국 학과 내에서 희망자를 찾지 못해 이대를 다니던 깜찍한 여학생을 데려다 찍었다. 정말 그 시대에는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단편영화의 특성이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숨 막힐듯한 시대의 분위기 또한 무시 못 할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 소극장에서 있었던 시사회 역시 아직은 우리들만의 잔치였다.

중앙대에는 분수가 있고 청룡동상이 있는 연못이 본관 앞에 있다. 학생들의 쉼터로 한 여름의 시원함을 더해주는 명소이다. 이곳에서 모여 앉아 무슨 얘기를 나누다 보면 만나는 정체불명의 프락치들이 많았던 시절이다. 대학동기 정태원의 별명은 말없는 사나이이다. 그러나 한번 말문을 열면 청산유수이나 항상 남 얘기만을 듣는다. 또 한명 정의의 사나이라고 할 만한 열혈남이 있었는데 청주대 교수로 정년퇴임한 김수남 교수이다. 물불 안 가리는 성격으로 알려진 학생이었다. 그리고 청룡상 주변을 맴도는 책장사 모두가 하수상하던 시절이다.

4학년 1학기에 휴학을 하고 군대영장을 기다리다가 극영화를 하고픈 생각에 충무로를 기웃거렸는데 당시 충무로에 있었던 ‘우진필름’의 유영무 선배를 찾아가 곧 촬영할 영화의 연출팀에 들어가기로 하다가 덜컥 군에 입대하게 됐다. 입영열차 타기 전에 나간 곳도 명동이었다. 명동을 기억에 다시 한번 새기기 위함이었는데 정말 아쉬운 이별을 해야 했다.

제대 후에도 명동 나가는 일은 줄었다. 영화진흥공사가 남산에 있어서 영화 보러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들르는 정도였는데 마지막으로 소개할 사람이 아직도 명동을 지키는 친구가 있다. 성과학연구소 소장이며 유명 비뇨기과 의원의 이윤수 원장인데 딴 데로 옮겼다가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오늘도 명동을 지키고 있다. 나도 모르게 사랑했던 명동. 그곳을 지키는 것은 문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말로 글을 마친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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