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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세상이야기] .‘청음(淸陰) 김상헌’ vs ‘ 지천(遲川)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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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세상이야기] .‘청음(淸陰) 김상헌’ vs ‘ 지천(遲川) 최명길’
  • 최기영
  • 승인 2014.10.09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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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말은 연산군 때 생긴 말이다.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내용대로 연산군은 자신을 낳고 궁궐에서 쫓겨난 어머니 폐비 윤 씨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관련자들을 잡아다가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툭하면 사람을 죽이고 온갖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렇듯 주색잡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던 연산군은 급기야 대신들을 시켜 조선팔도의 예쁜 여자들을 뽑아오게 하여 궁궐에 살게 하였다. 그 숫자가 무려 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용모가 예쁘고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여자들을 가려 뽑아 '흥청(興淸)'이라고 불렀다.

연산군은 하루에 천 명에 가까운 흥청을 매일 불러 놓고 떠들썩하게 연회를 열었다. '흥청거린다'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연산군은 이렇게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일삼다 결국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망청(亡淸)'은 흥청 때문에 연산군이 망했다 해서 별 뜻 없이 한데 어울러 쓴 것이, 세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다 보니 오늘날 사자성어처럼 굳어지게 되었다.

야당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강경하게 내세우는 세월호특별법안과 민생관련법안 통과의 빅딜이 만백성을 도탄의 지경에 빠뜨리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앞으로 한국 정치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실로 엄청난 주요 사건이 될 것이다. 국민을 대신한다는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큰 뜻을 거스르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나간다면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대가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은 나와 뜻이 상반된다고 무조건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말해주듯 절체절명의 극한 상황에서 얼마든지 반대의 뜻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그 뜻이 오히려 애국을 전제한 나의 뜻보다 훨씬 현명한 내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반대의 뜻이란 타당한 이유없는 한 개인적 집단의 이익을 위한 무조건적 반대가 아니어야 한다.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대국 중국은 늘 우리보다 힘이 센 큰 나라였다.

때는 광해군의 폭정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서인들이 북인을 몰아내는 반정을 일으켜 능양군을 새로운 임금 인조로 세운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한마디로 나라가 몹시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시기였다. 오래토록 친명정책을 써왔던 조선의 조정은 명의 몰락으로 혼란에 빠졌고, 새로운 왕조 청을 배척하는 경향이 짙었다. 이에 분노한 청 태종은 1632년 12월 2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쳐들어 온다. 이것이 바로 조선 최대의 굴욕을 당한 전쟁 병자호란이다. 전쟁을 미리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은 청나라의 기세에 바로 밀렸고, 왕권을 유지하려는 인조는 끝까지 청에게 항복을 거부하였다. 당시 조정은 청음(淸陰)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전파와 지천(遲川) 최명길의 주화파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당시 인조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던 최명길은, 침략에 미리 대비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방어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예견하여 강력히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어 기근ㆍ질병ㆍ약체 병력 등 복합적인 문제가 있음을 확인한 그는 병자호란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음을 들어 청나라에 항복할 것을 주장했다. 견디다 못한 인조는 최명길의 주장을 수용하여 항복을 결정하고 그에게 직접 항복문서를 작성하게 했다. 이때 그가 작성한 항복 문서를 주전론자인 김상헌이 울면서 찢어 버렸다. 하지만 최명길은 이 일에 대해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최명길은 오히려 자신이 쓴 찢어진 화의교서를 주워 모으며, “나라에는 문서를 찢는 신하도 필요하고, 나처럼 붙이는 신하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헌ㆍ송시열 등의 생각이 자신과 다르지만 그들의 생각도 애국심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최근 여당의 고집이라며 무작정 꺾어버리고야 말겠다며 무모하게 달려드는 야당이 특히나 새겨야할 대목인 듯싶다. 절체절명 위기의 기로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의견은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결코 상대가 미워서하는 소위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어서 더더욱 그렇다.

역사가 오늘까지 아름답게 기록하는 이유는 또한 김상헌과의 최명길의 개인적인 알력은 심양의 감옥생활 중 풀게 된다.

김상헌이 청나라에 압송되어 가면서 읊조린 시조가 오늘날에까지도 널리 회자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이 심양으로 압송될 당시 최명길도 같은 곳에 잡혀와 있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대립하던 양 진영의 이 두 대신이 포로 혹은 인질의 신세로 주고받은 시 또한 실로 대단하다.

최명길이 김상헌에게,

“湯氷俱是水, 裘葛莫非衣 / 끓는 물과 얼음 모두 물이고, 가죽 옷과 갈포 옷 모두 옷이네”

라고 읊자, 김상헌이 이렇게 화답했다.

成敗關天運 / 성패는 천운에 관계되어 있으니
須看義與歸 / 의(義)에 맞는가를 보아야 하리
雖然反夙暮 / 아침과 저녁이 뒤바뀐다고 해도
詎可倒裳衣 / 치마와 웃옷을 거꾸로 입어서야 되겠는가
權或賢猶誤 / 권도(權道)는 현인도 그르칠 수 있지만
經應衆莫違 / 정도(正道)는 많은 사람들이 어기지 못하리
寄言明理士 / 이치에 밝은 선비께 말하노니
造次愼衡機 / 급한 때도 저울질을 신중히 하시기를

조선에 있을 때 김상헌과 최명길은 사이가 나빠 김상헌은 최명길을 매국노 또는 도의를 저버린 비겁한 겁쟁이라며 싫어하였고, 최명길은 김상헌을 명분만 앞세우며 명예만 바라보는 사람으로 여겨 경멸하였다. 수감 중 두 분은 각자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서로의 해묵은 감정을 풀게 된다. 이때 김상헌과 주고받은 시문이 전한다.

이제야 서로의 우정을 되찾으니, 문득 백년 의심이 풀리는 구나 - 김상헌 -

그대의 마음은 돌 같아 끝내 돌이키기 어렵지만, 내 마음은 둥근 고리 같아 때로는 돌아간다오 - 최명길 -

심양의 감옥에서 서로 마음을 터놓게 된 김상헌과 최명길은 귀국 후에도 서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처한 각종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 오로지 나라와 민족만을 생각하며 이들처럼 죽을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기개야말로 오늘을 사는 위정자들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할 덕목임에 틀림없고,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위기의 기로에서 얼마든지 나와 다른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릇이 큰 사람이면 상대의 의견도 존중할 줄 알아야하고 대인답게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립은 서로에게 자그마한 앙금도 남겨서는 아니 된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인 우암(尤庵)송시열 선생은 《청음선생연보서》를 통해 스승 김상헌을 이렇게 기렸다.

“어지러움이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끝내 다스려지지 않으면 인류가 전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늘이 선생 같은 분을 내어 한 번 다스려질 조짐을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이 이미 선생 같은 분을 내었는데 사람이 도리어 선생 같은 분을 숨겨 두려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이 칼럼은 2014.09.11. 한림(漢林)최기영 선생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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