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 포용하기로 하는 등 중국 정책에 막대한 영향
중국 수탈 역사의 한복판에서 태어나 고속 성장 이끌어
[한국공정일보=이가은 기자] 중국 공산당의 제3대 지도자였던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30일 사망했다. 향년 96세.
중국 관영 신화통신과 CCTV 등 주요 언론은 장 전 주석의 별세를 애도하며 홈페이지 배경을 흑백으로 전환했다. 중국 공산당 주요 건물과 해외 공관에도 반기(半旗·조의를 표하기 위해 깃봉에서 한 폭만큼 내려서 다는 국기) 게양하기로 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는 이날 공동 성명을 통해 장 전 주석이 이날 낮 12시13분 상하이에서 별세했다고 전했다. 장 전 주석의 사인은 백혈병으로 인한 장기 기능 부전이다.
장 전 주석은 개혁·개방에 따라 주요 사회세력으로 성장한 자본가와 지식인을 포용해야 한다 내용의 3개 대표 사상을 발표, 공산당 당헌인 당장(黨章)에 포함시키는 등 중국의 주요 정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장 전 주석은 최고직인 국가주석(政)과 중국 공산당 총서기(黨),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軍)까지 겸임한 최초의 인물이다. 집권 기간은 마오쩌둥(27년) 다음으로 15년을 집권했다.
장 전 주석은 중국 개혁개방을 주도한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의 뒤를 이어 총서기로 선출됐다. 이후 1989년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 1993년 국가 주석직에 오르며 중국 최초로 당(黨)·정(政)·군(軍)을 모두 장악했다. 장 전 주석은 2003년까지 중국 최고 지도자로 재임, 이후 후진타오 전 주석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장 전 주석은 은퇴 이후에도 상하이방(上海幇)의 원로 역할을 하면서 정계에 깊숙이 개입했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 취임 이후 정치적 입지가 약화됐다.
장 전 주석은 외교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는 1992년 8월24일에는 한국과 수교했다. 1995년에는 중국 지도자로서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1999년에는 러시아과 국경문제를 해결했고, 1997년과 2002년에는 미국을 방문했다. 장 전 주석의 이런 개혁·개방 정책에 힘입어 중국의 경제도 급속히 발전했다.
장 전 주석의 집권기간(1989~2003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는 1조 6900억 위안(199조 5900억 위안으로 성장했다. 중국은 장 전 주석 집권동안 연평균 약 9.4%의 성장을 했다.
장 전 주석은 시대에 파룬궁 탄압이 시작됐다. 장쩌민은 초기에는 파룬궁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심지어 표창까지 수여했지만, 점차 파룬궁 수련자의 수가 공산당 당원 수를 넘어서게 되자 파룬궁 탄압을 지시했다는 주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