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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칼럼] 한국의 위인들(2) 성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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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칼럼] 한국의 위인들(2) 성삼문
  • 김동길 박사
  • 승인 2016.11.23 0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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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동길 박사. 1928년 평안남도 맹산 출생. 연희대학교 영문과 졸업. 美 인디아나 주 에반스빌대학 역사학과 졸업. 보스톤대학 철학발사 학위 취득(링컨 연구). 연세대학교 교수, 교무처장, 부총장 역임. 조선일보사 논설고문. 제14대 국회의원.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현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저서 : <길은 우리 앞에 있다>, <링컨의 일생>, <한국청년에게 고함> 등 80여권 출처 : www.kimdonggill.com]

[한국정경신문=김동길 박사] “역사는 위인의 전기다”라고 말한 역사가가 있었습니다. 민중의 힘이 역사의 원동력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민중은 이름이 없고, 그들을 움직이는 지도자의 이름만이 역사에 남습니다. 역사책에는 위인들의 이름만 남아 있습니다.

위인이란 남다른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장수는 엄마의 배를 뚫고 나온다”는 끔찍한 말이 있는데 그 속담을 뒷받침하는 것은 서양에 전해지는 '제왕수술(帝王手術 - Caesarean)'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Julias Caesar가 그렇게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위인의 소질이나 능력을 타고나는 사람은 상당수 있지만 그 소질이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만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웅은 난세에 나타난다”는 말이 생겼을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나폴레옹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삼문(1418-1456)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기 직전 하늘에서 “낳았느냐?”라는 물음이 세 번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뭔가 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 살이 되었을 때 이미 훌륭한 문장을 엮었다고 하니 가히 신동에 해당하는 어린이였습니다.

그는 나이 스물아홉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 하였고, 시종여일 이 나라의 선비로 살았습니다. 왕명으로 경연관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이개 등과 한글의 창제를 앞두고 당시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중국의 한림학사 황찬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한글을 다듬어 마침내 세종 28년에 '훈민정음'이 반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455년 세조가 조카인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비 성삼문은 “옳은 일을 보고도 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친 공자의 그 정신을 이어 받아 과감하게 '단종 복위'를 위해 세조 살해를 치밀하게 계획했지만 김질이라는 배신자의 밀고로 들통이 나 자결하지 않은 모반자들은 처형되었습니다. 성삼문 등은 거열(車裂)당했습니다. 그가 떠나면서 <사세가(辭世歌)> 한 편을 남겼습니다.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회두일욕사(回頭日欲斜)
황천무일점(黃泉無一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북소리 덩덩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네
고개 돌려 바라보니 지는 해는 서산에
황천 가는 길에는 여인숙도 없다니
이 밤을 뉘 집에 묵어 갈 건가

성삼문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당당하게 저승으로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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