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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칼럼] 한국의 위인들(3)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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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칼럼] 한국의 위인들(3) 이순신
  • 김동길 박사
  • 승인 2016.11.23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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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동길 박사. 1928년 평안남도 맹산 출생. 연희대학교 영문과 졸업. 美 인디아나 주 에반스빌대학 역사학과 졸업. 보스톤대학 철학발사 학위 취득(링컨 연구). 연세대학교 교수, 교무처장, 부총장 역임. 조선일보사 논설고문. 제14대 국회의원.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현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저서 : <길은 우리 앞에 있다>, <링컨의 일생>, <한국청년에게 고함> 등 80여권 출처 : www.kimdonggill.com]

[한국정경신문=김동길 박사] 만일 이순신(1545-1598)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가 1576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정읍현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임진왜란으로 한반도는 영구히 일본 열도의 일부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끔찍한 상상이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10만 왜군의 침략을 당한 조정은 박살나고 임금은 의주로 도망가고 백성은 수도 없이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찔려 죽고 밟혀 죽고, 한반도는 문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선조는 귀담아 듣지 않았으나 덕수(德守) 이 씨 이순신은 귀담아 듣고 준비하였습니다. 율곡 또한 덕수 이 씨로 문중의 어른이요 당대의 천재적 경세가인 동시에 선각자였습니다. 이순신은 그래서 거북선을 만들고 수군 훈련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왜군은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 -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그는 이미 불혹의 40을 넘은지도 한참 되는 장년의 수병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전투마다 승리하여 왜군의 침입을 저지했지만 중상모략이 난무하여 걷잡을 수 없던 그 시절 그는 왜군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인해 재판을 받았고 '백의(白衣)종군'이라는 사형에 버금가는 중형을 언도받고 졸병이 되어 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백의종군'의 형이 선고되었을 때 그는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난중일기>에 “나는 죽고 싶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습니다. 효성이 지극하던 충무공이 모친상(母親喪)을 당했을 때니 그의 가슴은 미어질 듯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싸움터로 향하여 떠났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 요새 계급으로 하자면 해군 중장은 되던 그가 졸병이 되어 종군합니다.

조정이 뒤늦게 삼도수군통제사의 억울함을 깨닫고, 백의종군하던 그에게 다시 그 지휘봉을 맡기며 “미안하다”고 하였을 때 그는 “그럴 수 없다”고 하지 않고 “하겠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조정은 “왜놈들을 물리치기만 하면 된다”고 아마도 사정했겠지만 충무공의 결의는 단호하였습니다. “어쩌자고 그런 허약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이놈들을 박살을 내야죠!”

그가 조정에 올린 장계는 간단명료한 여덟 글자뿐이었습니다.

상유십이(尙有十二)
순신불사(瞬臣不死)

이 여덟 글자를 눈물 없이 읽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고 아직도 이순신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그런 그의 정신이 조국을 살렸습니다. 울돌목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마지막으로 노량에서 왜적을 대파하였습니다.

그는 기함의 갑판 위에서 지휘하다가 적의 흉탄을 맞고 쓰러지니 때의 나의 53세였습니다.

나는 오늘도 광화문 네거리에 서 계신 충무공 이순신을 우러러보면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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