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7 21:53 (토)
[김동길 칼럼] 한국의 위인들(6) 윤봉길
상태바
[김동길 칼럼] 한국의 위인들(6) 윤봉길
  • 김동길 박사
  • 승인 2016.11.27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김동길 박사. 1928년 평안남도 맹산 출생. 연희대학교 영문과 졸업. 美 인디아나 주 에반스빌대학 역사학과 졸업. 보스톤대학 철학발사 학위 취득(링컨 연구). 연세대학교 교수, 교무처장, 부총장 역임. 조선일보사 논설고문. 제14대 국회의원.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현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저서 : <길은 우리 앞에 있다>, <링컨의 일생>, <한국청년에게 고함> 등 80여권 출처 : www.kimdonggill.com]

[한국정경신문=김동길 박사] 중국 상해에 있는 홍구 공원에 세 번쯤 들려 보았습니다. 지금은 그 공원의 이름이 노신 공원으로 바뀌었는데 모택동이 이곳에 무산 작가 노신의 무덤을 마련하고 공원의 이름도 '노신'으로 바뀌었고 모택동의 독특한 글씨로 그렇게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윤봉길은 충청도 덕천 사람입니다. 호적이 정확하다면 그는 1908년생입니다. 중농 집안에 태어나 농사를 짓는 한편 야학을 열어 민중 계몽에 앞장섰던 시골의 선각자이기도 했습니다. 관례대로 일찍 장가들어 부인도 있고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각종 압박으로 인해 농촌이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는 사실에 그는 분개하였습니다.

대책이 없을까 고심하던 중 어느 날 그는 상해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는데 사전에 무슨 연락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독립 기념관의 관장으로 임명된 윤 의사의 손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떠나는 날 아침에 저의 할머니에게, '나 물 한 그릇 주시오'라고 부탁을 하고 그 물 사발을 받아 마시면서 한 마디도 말씀을 안 하시고 할머니를 마주 보시지도 않았답니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면서 “이것이 내 아내를 보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왜 몰랐겠습니까? 허름한 여장으로 마당에 서서 아내에게 '물 한 그릇'을 달라고 하던 이 사나이의 심정을 헤아릴 때 한국인의 눈에는 눈물이 맺힙니다. 진정, 처절한 인생의 한 장면입니다.

사나이 우는 마음 누가 알리오
울래야 울 수 없는 사나이 마음

그는 상해로 떠났습니다. 김구가 조직한 <한인 애국단>에 이미 가입한 윤봉길이었습니다. 단장 김구와 함께 커다란 태극기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태극기는 학병으로 끌려서 중국에 갔다가 광복군에 입대했던 <사상계>의 장준하가 여러 해 간직하고 있다가 죽기 전에 이화여대 박물관에 기증하였습니다.

윤 의사의 '선서문'도 남아 있습니다.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 애국단 앞

그리고 그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을 겸하여 축하하는 일본인 요인들과 현지 사령부의 장군, 장교들이 앉은 자리를 향해 도시락 사제 폭탄을 던져 굉음과 함께 여럿이 죽고 부상당하고 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윤 의사는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일본 땅 가나자와 에서 총살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을 몰래 길바닥에 묻은 것을 찾았고 윤봉길 의사 충헌비는 가나자와 교외에 우뚝 서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