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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칼럼] 한국의 위인들(12)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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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칼럼] 한국의 위인들(12) 이승만
  • 김동길 박사
  • 승인 2016.12.01 2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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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동길 박사. 1928년 평안남도 맹산 출생. 연희대학교 영문과 졸업. 美 인디아나 주 에반스빌대학 역사학과 졸업. 보스톤대학 철학발사 학위 취득(링컨 연구). 연세대학교 교수, 교무처장, 부총장 역임. 조선일보사 논설고문. 제14대 국회의원.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현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저서 : <길은 우리 앞에 있다>, <링컨의 일생>, <한국청년에게 고함> 등 80여권 출처 : www.kimdonggill.com]

[한국정경신문=김동길 박사] 우남 이승만(1875-1965)이 1948년부터 12년 동안 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을 때에는 그가 유능한 인물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라고는 인정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미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4‧19의 시위가 벌어지고 경무대의 발포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미련 없이 하야하고 걸어서 사저인 이화장으로 가겠다고 고집했다는 말을 듣고 우남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구한국 말인 1899년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무고로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6년이나 복역한 끝에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하여 고학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대학에선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프린스턴에서는 미국의 28대 대통령이 된 우드러 윌슨 밑에서 의회정치를 공부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미국의 정치 학계에서도 저명한 학자로 알려졌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 조직된 임시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되었고, 이듬해에는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마흔 다섯이었습니다. 의견 차이가 하도 심해서 그는 상해를 떠나 미주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꾸준히 펴나갔습니다.

내가 미국서 공부하던 때 한동안 우표 수집에 열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우표 가게에서 1940년에 발행된 기념우표 시리즈가 있다는 걸 알고 찾아봤더니 폴란드를 위시하여 외세에 압박받는 열 나라의 국기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열 번째가 태극기였습니다.

미주에서 건축사로 활약하는 한편 우표수집의 대가로 알려진 이병두 선배를 만나서 어찌하여 태극기가 미국 기념우표에 나왔는가 물었더니 이 선배 말이 “그건 이승만이 미국 연방정부의 우정 책임자(Post Master General)를 찾아가 직접 담판해서 얻어 낸 결과일 것이라고 내게 일러 주었습니다.

허정 대통령 권한 대행의 주선으로 하와이로 다시 가서 85세의 노 대통령은 생활비도 넉넉지 않아 허술한 숙소에서 살다가 마침내 허술한 병실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방문객에게 고국의 정치적 상황을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답니다. 우남은 최인규 등이 부정선거를 모의하고 있는 사실을 전혀 몰랐답니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하야를 결심한 것 같습니다. 부정선거를 하고 대통령 자리를 지킬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독선과 아집의 정치가'라는 비난을 아직도 면할 수는 없지만 그 '독선과 아집'이 없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독선이 대한민국을 낳았고, 그의 아집이 대한민국을 지킨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나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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